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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는 왜 독일로 갔을까?

woman inside laboratory

글, 정인


최근 몇 년간, 오랫동안 유지해왔던 우리나라 의료계 지형에 변동이 일고 있어요. 필수의료 공백과 지방의료 붕괴가 핵심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0년, 정부는 공공의대 설립과 의대 정원 400명 증원을 추진했어요. 하지만 전공의·의대생이 정부의 공공의대 설립에 반대하면서 추진안은 실패했습니다. 


당시 전공의와 의대생이 파업하자 대체인력이 된 간호사가 주목받으며, 전공의 업무를 일부 수행할 수 있는 ‘PA간호사 합법화’ 의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PA는 Physician Assistant의 약자로 전공의(전문의 자격을 취득하기 위하여 수련을 받는 인턴 및 레지던트)의 역할을 일부 대신할 수 있는 간호사입니다. 미국에서 특히 활성화돼 있고, 한국에서도 계속 발전하고 있어요. 현재 한국에서도 PA간호사는 전공의와 함께 교육을 받을 정도로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직접 의료업무를 보는 건 현재 불법이이에요.

그러나 관련 내용이 들어 있던 간호법은 2023년 지난해, 국회 통과 후 대통령 거부권이 행사되며 폐기됐어요. 하지만 올해 정부가 다시금 의대 정원 2,000명 증가를 추진하며 다시 전공의 파업이 시작됐고, 정부는 폐기했던 간호법을 재논의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간호사가 지금처럼 뉴스를 장식하던 시절이 또 있었습니다. 그것도 의료보다 경제와 관련해서 말이에요.

🎬 Scene #1.
‘조국 근대화의 산업 역군’
파독 간호사

옛날 간호사: 라떼는, 그니까 1966년~1976년까지 1만 간호사 부대가 나라 경제를 일으켰거든. 독일에 파견 나간 간호사와 광부가 한국으로 보낸 외화가 국민총생산의 2%를 차지할 정도였다고.

the 독자: 파독 간호사 얘기는 교과서에서 얼핏 봤던 것 같아요. 이분들은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옛날 간호사: 당시에 독일에서 전문인력으로 일하다가 지금은 은퇴하고 쉬고 있지.


혹시 ‘파독 간호사’를 아시나요? 우리나라가 아주 어려웠던 시절, 간호유학생으로서, 또 해외인력 수출정책에 따른 이주노동자로서 독일(서독)로 파견을 나간 간호사들입니다. 


이분들의 이야기를 되짚어 보면 최근에 간호사의 역할 범주를 둘러싼 이슈는 물론, 이주노동에 대한 경제적·사회적 맥락과 근현대 한국 경제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그 시절, 여성에게
허용됐던 전문직


간호사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대표적인 여성 직업이었습니다. 여성이 직업은 커녕 글자 배우는 것도 쉽지 않던 시절. 간호사만은 여성의 전문적인 직업 영역이었죠.


🎬 Scene #2.

1908년, ‘한국 간호사’의 시작


옛날 간호사: 옛날에는 간호학교에 여성들만 입학을 허락해 줬다니까. 최초의 졸업생이 1908년에 나왔는데, 이후로 아주 인기가 많았어.

어피티: 자료를 보니, 일제 강점기와 해방 직후인 1940년대 중반 조선에는 간호사가 총 2,254명이었는데, 그중 조선인이 1,017명이나 되더라고요.

옛날 간호사: 면허 없이 기술 익혀서 간호사로 일한 여성들은 세 배, 네 배는 됐을걸. 일본 식민정부에서 간호사만큼은 조선 여성한테도 교육과 취직을 허락했으니.

the 독자: 지금도 전문 의료인이 되기가 힘든데, 힘든 시절에 열정이 정말 대단했던 것 같아요.

옛날 간호사: 그땐 말이지, 간호사를 포함해서 2년 이상 의료보건업을 하면 의사 면허를 줬어. 

the 독자: 그랬군요, 신기하네요.


📚 이꽃메,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 간호제도에 관한 보건사적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9, 240쪽.

📚 Mary Cutler, “Po Ku Nyo Koan” 1907, pp. 13-28

나라도 살리고

나도 출세하고


보통 언론이나 교재에서 파독 간호사에 대해 묘사할 때는 ‘동양인 여성 이주노동자로서 겪은 차별이나 서러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외화벌이를 위해 우리 누이들을 값싼 노동력으로 팔아버린, 가난해서 슬픈 역사’라는 식의 보도가 많이 됐어요.


🎬 Scene #3.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


어피티: 그 내용들이 모두 사실인가요?

옛날 간호사: 절반 정도만? 간호사가 정식으로 파견된 게 1966년부터인데, 당시 못 사는 나라였던 한국에서 어떻게 선진국인 독일로 간호사를 정식 파견할 수 있었는지부터 생각해 봐야겠지.

the 독자: 듣고 보니 그렇네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나요?

옛날 간호사: 1950년대부터 이미 한국 여성들이 간호사로 많이 가 있었거든. 이미 많이들 와서 자리를 잡고 있으니 나중엔 아예 정부 차원에서 공식 제안이 된 거야.

the 독자: 1950년대부터요? 왜요?

옛날 간호사: 여성들이 말이야, 뭐라도 배워서 존경도 받고 돈도 많이 벌고 싶은데 한국에선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거든. 열정 있고, 정보력 있는 여성들은 교회나 선교단체를 통해 독일로 유학을 가서 배우고 일하고 그랬지. 돈을 못 받더라도 간호학생 신분으로 일한거야.

the 독자: 돈을 안 받고 일했다고요?

옛날 간호사: 기숙사에서 재워 주고, 밥 주고, 의료기술도 가르쳐 주는 것만으로 감지덕지다 했지 그때는. 그래도 일단 자격 따서 독일에서 정식으로 취직하면 한국에서 받던 월급의 최소 열 배는 받았으니까. 3년 일하면 한국에 집 한 채 살 수 있는 돈이었어.

the 독자: 그래서 50년대부터 독일에 많이 갔던 거군요.

옛날 간호사: 그렇게 번 돈을 한국으로 착실하게 송금했지, 모두들. 정식 파견이 시작된 1960년대 후반부터는 학생 신분이 아닌 정식 간호사들이 독일로 왔어.


1950년대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 한국은 정말로 ‘못사는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다들 잘살고 싶어 해서, 어떻게든 자식들을 가르치려 했죠. 경제규모는 작아서 일자리는 부족한 와중에 많이 배운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고학력 실업자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동시에 경제 개발을 위한 자본도 부족해서 외국에서 달러 빚(차관)을 빌려와서 충당했습니다. 원금도 이자도 모두 달러로 내야 하니까 외화도 부족했죠.


그러니까 독일로의 간호사 파견은 세 가지 문제가 한번에 해결되는 일이었어요.


  • 여성들의 학구열과 사회 생활 열망 충족
  • 나라 전체적으로 높았던 실업률을 해외 취업으로 해결
  • 파독 간호사들이 한국으로 달러를 부치면 외화 부족 완화


📚 나혜심 「파독 한인여성 이주노동자의 역사(2007)」, 한국학술진흥재단

왜 독일이었을까? 


그런데, 왜 독일에서 유독 한국의 간호인력을 필요로 했을까요?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독일은 당시 역사적·문화적인 이유로 간호사의 의료 행위를 하녀의 섬김 활동이나 종교적 봉사 활동처럼 여기곤 했습니다. 


1960년대에 독일은 최고로 잘나가는 나라였거든요. 경제성장도 빠르고, 다른 일자리도 많았어요. 간호사는 월급은 낮고 일도 힘든데다 사회적 인식도 낮으니 하려는 사람이 별로 없었죠.


🎬 Scene #4.

각성해버린 독일


어피티: 그래서 ‘못사는 나라’인 한국에서 노동 인력을 수입한 거군요. 

옛날 독일 사람: 그것도 그렇고, 당시 한국 간호사의 의료전문성 수준이 독일 간호사의 수준보다 훨씬 높았거든. 한국 간호사들은 미국식 체계로 교육을 받았는데 독일 간호사들은 좋은 교육을 못 받았어.

the 독자: 그럼 계속 한국 사람을 간호사로 부르지, 왜 1970년대 후반에 인력 수입을 그만뒀대요?

옛날 독일 사람: 1960년대 즈음 독일 경제가 자리를 잡고 복지체계도 정비됐어. 평균수명이 높아지면서 장수하는 노인들이 갑자기 늘었거든. 병원에 자주 다녀야 하다 보니 간호인력 필요가 늘어났지. 그 간극을 한국인 간호사들이 채운 거야. 그때 우리가 깨달은 게 있어.

the 독자: 뭘요?

옛날 독일 사람: 간호사라는 직업이 아주 중요한 전문직이라는 걸 말이야.


1970년대 후반부터는 독일 간호사의 월급도 아주 많이 올랐고, 처우도 좋아지고 체계도 개선돼서 독일 사람들이 간호사를 하고 싶어 했어요. ‘값싼 외국인 노동자’가 필요 없어진 거죠.


그리고 지금,
한국의 이야기


현재 우리나라는 심각한 간호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2023년 기준 우리나라 임상 활동 간호사는 인구 1,000명당 5.02명으로, OECD 평균인 8명의 절반을 살짝 넘는 수준이에요. 인력 부족의 원인은 1960년대 독일과 어느 정도 비슷하지만, 우리는 과거 독일처럼 이주노동이라는 해결책을 사용할 수 없답니다. 한국에서 보건의료 직종에 외국인 노동자를 채용하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거든요. 


한국의 의사와 간호사는 한국 의대와 한국 간호대를 나와 한국의 국가자격시험을 봐야 면허를 취득할 수 있습니다. 외국의 의사나 간호사 면허를 인정해 주지 않고 있어요.


하지만 간호사 수요는 계속 늘어납니다. 사람들은 65세 이후 평생 쓰는 의료비의 절반을 지출합니다. 1975년만 해도 한국 평균 수명은 63세였는데요. 2022년 기준 평균 수명은 82.7세까지 올라왔습니다(여성들은 이보다 더 오래 살고, 의료비를 더 많이 지출합니다.) 모두가 더 오랫동안 병원에 들락거리며 병원비를 지출하게 됐다는 뜻이에요. 1970년대 후반, 독일이 간호사의 중요성에 눈뜰 때와 비슷한 상황입니다.


간호사가 몹시 부족하지만 간호대 졸업생이 부족한 건 아닙니다. 간호사가 부족한 이유는 ① 장시간 노동 ② 야간 근무 ③ 경력 관리의 어려움 ④ 낮은 임금 체계 ⑤ 간호사에 대한 사회적으로 낮은 인식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떤 직군의 노동환경이 업무의 수준에 비해 열악하면 인력수요에 비해 인력공급이 부족해집니다. 이건 1960년대의 독일과 무척 비슷하죠. 


📚 김학선, 홍선우, 최경숙 「파독간호사 삶의 재조명(2009)」,  한국산업간호학회지 제18권 제2호

이대로 가도 될까?


🎬 Scene #5.

간호사가 더 부족해지면


옛날 파독 간호사: 지금 한국 의료계를 보면 괜히 마음이 이상해. 예전에 우리나라가 못살 때, 독일이 겪던 문제를 해결하려고 가서는 ‘선진국은 사람들이 직업을 골라 갖기도 하는구나’ 했는데. 지금은 우리나라가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잖아?

어피티: 계속 간호사가 모자라면 환자들은 어떻게 될까요?

옛날 파독 간호사: 그나마 대우가 괜찮은 대형 병원에만 간호사가 있을 테니 대학병원에만 가게 되겠지, 뭐. 그럼 계속 대학병원 진료가 몰릴 테고, 중소형 병원은 비보험 미용 진료나 비보험 영양제 처방 위주로 운영될 테고, 결국 건강보험료가 오를 거고, 극단적으로 치닫는다면 중소형 병원이 대부분 폐업해서 굉장히 오랜 시간 대기해야 진료를 받게 될 수도 있지. 아무리 건강보험료를 많이 낸다고 해도, 돈이 많은 소수의 병원에만 갈 수 있을 거고…


간호사 공급부족 문제가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이유. 앞으로도 수요는 계속 늘어날 텐데 이대로라면 공급은 줄어들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에요. 그러면 경제학적으로 결과는 단 하나입니다. 서비스의 가격이 올라갑니다. 


가격 인상을 인위적으로 막는다면 부작용으로 서비스 이용이 심각하게 제한되죠. 은퇴한 이후 의료비를 크게 지출해야 하는 지금, 간호사 문제는 빨리 해결해야 할 경제적 문제입니다. 노후자금의 대부분을 병원비로 날릴 수는 없으니까요.


📚 문혜경, 「전담간호사 제도 개선방안에 대한 통합적 연구(2020)」, The Journal of the Convergence on Culture Technology (JCCT) Vol.6 No.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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