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 위기 중 빛난 정유산업의 전략적 가치

글, 최지웅


세계적인 정제 능력을 갖춘 정유 강국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정제 기술과 설비를 보유한 정유 강국이에요. 정제 능력은 세계 5위 수준이죠. 우리보다 높은 수준의 정제 능력을 갖춘 국가들은 대체로 내수 소비 비중이 커요. 반면 우리나라 정유산업은 수출 비중이 높은 편이에요.

2025년 기준 약 760억 달러어치의 원유를 수입한 뒤, 이를 휘발유·경유·항공유 등 석유제품으로 가공해 약 450억 달러어치를 수출했어요. 석유제품은 반도체와 자동차에 이어 우리나라의 세 번째 주요 수출 품목이에요.
석유산업에서 정제 능력이 중요한 이유
아무리 원유가 많이 나는 국가라고 하더라도, 그것만 있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실제로 최종 소비자가 사용하는 것은 원유가 아니라 휘발유, 경유, 등유, 항공유와 같은 석유제품이에요. 정제 능력이 원유 생산 능력 못지않게 중요한 이유예요.

그래서 우리나라처럼 석유를 전량 수입하는 국가가 정제 능력이 있다는 것은 ‘전략적 가치’를 만들어요. 에너지 수입국으로서의 약점을 보완하고 석유제품 수급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국제유가가 오를 때 석유제품 수출액이 함께 늘면, 늘어난 비용으로 인한 충격을 상쇄할 수 있어 위기 상황에서 큰 도움이 돼요.

우리나라의 석유 비축 물량이 평균 이상인 이유
1973년 설립된 국제에너지기구(IEA)는 회원국에 석유 순수입량 기준 최소 90일분을 비축하도록 요구하고 있어요. 전쟁, 테러, 천재지변 등으로 원유 공급이 갑자기 차단되는 상황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기 때문이에요. 특히, 우리나라와 같은 에너지 수입국에게 석유 비축 물량을 확보하는 것이 국가의 안보와 산업이 달린 중요한 과제예요.

지금 우리나라는 정부와 민간이 보유한 재고를 합쳐 IEA 기준을 크게 웃도는 200일 이상의 비축 능력을 갖추고 있어요. 한국석유공사의 정부 비축유와 민간 정유사의 상업 재고를 합친 결과예요.

정유사들은 정제시설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국내 공급과 수출 계약을 문제 없이 이행하기 위해 일정 규모의 원유와 석유제품 재고를 상시 보유하고 있어요. 우리나라 전체 석유 재고 가운데 100일분 안팎은 민간 정유사가 보유하고 있어요. 정유사들이 석유공사의 전략 비축유 일부를 보완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거죠.

호르무즈 위기 때 더욱 빛난 정유산업의 가치
국가 에너지 안보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정유산업의 가치는 지난 3월 이후 이어진 호르무즈해협 봉쇄 사태에서 더욱 부각됐어요. 호르무즈해협이 봉쇄된 동안 많은 나라들이 항공유 부족에 시달렸어요. 일부 항공사는 운항 노선을 축소하거나 중단했고, 항공 운임도 크게 올랐어요.

반면 우리나라는 상대적으로 충격이 적었어요.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우리나라의 정유산업 때문이에요. 우리나라는 국내 소비량을 크게 웃도는 항공유 생산 능력을 바탕으로 미국과 호주 등에 제품을 공급하고 있어요. 항공유 수출량 기준으로 중국에 이어 세계 2위예요. 이러한 생산·수출 능력은 위기 상황에서 우리나라의 외교력과 협상력을 높이는 기반이 되어주었어요. 
호주의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줘요. 호주는 등유 수입의 상당 부분을 우리나라에 의존하고 있고, 경유 수입에서도 한국산 제품의 비중이 작지 않아요. 미국 역시 우리나라에서 상당량의 항공유를 수입하고 있어요. 이러한 교역 구조는 우리나라의 협상력을 높여요. 우리나라는 이들 국가에 고품질 석유제품을 공급하기 때문에 지정학적으로 불안한 상황에서도 원유를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데 유리해요. 단순하게 말하면, 원유와 석유제품을 서로 맞교환하는 구조가 가능한 거예요.

지난 4월 1일 사우디아라비아와 UAE, 카타르 등 걸프협력회의(GCC) 6개국이 우리나라를 최우선 파트너로 평가하며 원유의 안정적인 공급을 약속한 배경에도 이러한 정유산업의 경쟁력이 있어요. 산유국 입장에서 우리나라는 단순한 원유 구매자가 아니에요. 중동산 중질유를 안정적으로 정제할 수 있는 고도화 설비를 갖춘 나라죠. 또한 아시아 석유제품 시장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나라예요.

결론적으로, 우리나라는 원유를 생산하지는 못하지만 위기 때 버틸 수 있는 저장 능력이 있고 이를 고부가가치 석유제품으로 바꾸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요. 이를 바탕으로 국내 산업을 지키고 수출을 가능하게 하고, 에너지 비축과 국가 협상력을 강화하는데도 기여하고 있어요.
📌필진 소개: 안녕하세요. 한국석유공사 정보분석팀에서 석유 시장과 산업, 에너지 전환과 탄소 문제를 연구하는 최지웅입니다. 저는 석유 수급과 에너지 정보 등 다양한 업무를 맡으며 현장을 경험해왔습니다. 여러 방송을 통해 에너지 산업의 변화와 미래를 전한 공로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표창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역사와 경제의 흐름 속에서 에너지 산업을 바라보면서, 여전히 ’세계를 움직이는 힘’인 석유에 대해 짚어보고자 합니다. 지은 책으로는 ⟪2050 에너지제국의 미래⟫와 ⟪석유 제국의 미래⟫가 있습니다.

💌 <석유라는 패권>은 수요일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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