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인
📌 경제와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작품을 어피티가 소개한다? 네, 그렇습니다. <어피티 인생극장>은 드라마, 영화를 주제로 경제 이야기를 줄줄 떠드는 시리즈로 기획되었어요. 스포일러 없이 영화 추천도 받고 얼떨결에 경제상식도 얻어갈 수 있는 어피티 인생극장 시리즈,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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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영화, <화양연화(2000)>
장르: 드라마, 로맨스
추천인: the 독자
the 독자의 별점: ⭐⭐⭐⭐⭐
“먼지 낀 창틀을 통해 과거를 볼 수는 있겠지만
모든 것은 희미하고 잡을 수도 없어요”
영화 평론을 읽다 보면 ‘미장센(mise en scene)’이라는 단어를 종종 만나게 됩니다. 무대, 화면을 연출하는 사람이 화면 안에 담기는 배경과 조명, 소품 등의 요소를 배치하는 행위 또는 그 연출에 따른 미학을 뜻하죠.
미장센이 있다는 건, 연출자가 배우의 대사나 표정 외에도 배경, 조명, 소품 등으로도 표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뜻이에요.
예를 들어 차가운 느낌을 주는 메탈 시계가 화면을 채우면서, 빠르게 움직이는 초침으로 점점 클로즈업된다면 관객은 뭔가 불안하고 초조한 느낌을 받을 거예요.
오렌지색 햇살이 흐릿하게 비치는 창가인데, 창틀 옆 벽지가 옛날식 꽃무늬 벽지라면 관객은 ‘꿈인가?’, ‘추억 회상인가?’ 생각하게 되겠죠. 이렇게 미장센은 끝없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감독마다 스타일도 달라요.
꽃처럼 아름다운 한때, 혹은 사랑
영화 <화양연화>는 아름다운 미장센으로 유명한, 왕가위 감독의 영화예요. 제목의 ‘화양연화(花樣年華)’는 피었다가 이내 져버리는 꽃처럼 아름다운 한때, 혹은 사랑을 뜻합니다.
1960년대 홍콩, 남자 주인공 ‘차우(양조위)’와 여자 주인공 ‘첸 부인(장만옥)’은 아파트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칩니다. 같은 날, 같은 아파트의 바로 옆집으로 이사 온 상황이었죠. 서로 가벼운 인사만 나누고 헤어졌지만, 이후로도 자꾸 우연한 만남이 계속돼요.
그러던 어느 날, 뭔가 이상한 것이 눈에 띄어요. ‘차우’의 넥타이는 ‘첸 부인’이 남편에게 사준 것과 똑같고, ‘첸 부인’의 가방은 ‘차우’의 아내 것과 똑같은 거예요. 둘은 각자의 배우자가 불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핑계로 둘의 만남을 이어가게 됩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둘은 서로에게 몹시 끌렸지만,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 무척 달랐습니다. 둘 다 윤리와 도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캐릭터이기도 해요. 그래서 두 사람은 마치 짝사랑을 하듯이 행동하죠.
여기서 왕가위 감독의 미장센이 등장합니다.
- 데이트를 할 때조차 둘이 마주 보고 있는 장면이 화면에 잘 잡히지 않습니다.
- 서로 대화할 때도 한 사람만 화면에 나오고, 캐릭터는 화면 한쪽에 치우쳐져 있어 마치 먼 곳을 바라보며 독백하는 것처럼 보여요.
- 두 사람이 하나의 화면에 잡히더라도 꼭 뒷모습이나, 한 사람이 떠나가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이렇게 <화양연화>에서는 미장센이 캐릭터의 감정선이나, 영화의 스토리라인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경제지표에도 미장센이 있다면 믿으시겠어요?
GDP는 ‘발명’ 됐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경제지표가 꼽아본다면 바로 ‘GDP’일 거예요. GDP는 ‘Gross Domestic Product’의 약자로, ‘국내총생산’이라고 직역합니다. GDP를 통해 국가 경제의 종합적인 상태를 진단할 수 있어요.
미국 정부는 GDP를 두고 20세기에 발명된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로 꼽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얘기지만, 모든 경제지표는 다 ‘발명’된 것입니다.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처럼 자연적으로 정해진 것도 아니고, 흙에 씨앗을 심고 물을 주면 싹이 나는 것처럼 누구나 관찰할 수 있는 현상도 아니에요.
가만두니까 잘 안되네? 어, 열받네?
국가 경제의 상태와 시장의 규모를 파악해야 한다는 인식은 1920년대와 1930년대 대공황을 거치면서 생겨났습니다.
예전에는 최대한 시장이 알아서 굴러가게 내버려 두면 다 잘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굳이 경제 상황을 판단할 필요가 없었어요.
하지만 대공황을 거치면서 시장도 실패를 하기 때문에 정부가 개입할 필요가 있다는 사회적 합의가 생겨났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죠.
‘국가 경제는 도대체 어떻게 측정하지?’
‘시장의 규모는 어떻게 알아낼 수 있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1937년, 쿠즈네츠 교수가 GDP를 발명하며 찾아냅니다.
그것이 시장의 규모라는 ‘추론’
GDP의 학문적 정의는 ‘일정 기간 한 나라 안에서 가계·기업·정부가 새롭게 생산한 모든 재화와 서비스의 시장가격을 더한 값’이에요.
이 숫자를 통해 특정 기간에 벌어진 모든 경제활동의 규모를 알 수 있고, 그것이 바로 시장의 규모라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추론’이 발명품이에요.
국가 경제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각 경제 주체들의 경제활동, 그리고 그 결과물로 특정 기간의 경제 현황을 읽어낼 수 있다는 것. 꼭 소품과 배경을 통해 캐릭터의 감정선과 스토리 방향을 읽어내도록 하는 영화 연출 같죠.
기업과 개인, 그리고 GDP의 서사
각 경제 주체들의 경제활동과 GDP 사이의 관계는 이렇습니다. 고등학교 사회 교과서에서 비슷한 그림을 보신 적 있으실 거예요.
예시를 통해 이 흐름을 설명해 볼게요. 사람들 주머니가 넉넉해 시장에서 활발하게 소비한다면 물건이 많이 팔리겠죠. 물건이 많이 팔리면 회사는 물건을 많이 생산하게 됩니다.
물건을 많이 생산하려면 직원이 많이 필요하니까 고용이 늘어날 테고, 그러면 월급을 받는 사람들이 늘어나 시장에서 돈이 다시 돕니다.
GDP는 바로 이 과정을 추적한 거예요. 조각품처럼 물성이 있는 실체라기보다는 과정을 묘사한 스케치랄까요.
GDP의 정의를 뜯어보면?
그렇다면 ‘일정 기간 가계·기업·정부가 새로 생산한 모든 재화와 서비스 가격의 총합’은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요? 정리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일정 기간: 보통 월, 분기, 년 단위로 측정합니다.
새로 생산: 위에서 정해둔 기간 동안 새로 만든 제품과 서비스만 포함됩니다. 물건을 새로 만들려면 그만큼의 자본이 들어가고, 인건비가 발생하지만, 중고 거래는 이런 경제활동을 수반하지 않아요.
재화와 서비스
- 말 그대로 시장에서 돈과 교환된 모든 신규 재화와 서비스를 뜻합니다.
- 여기서 중요한 것은, 최종 제품만 재화에 해당한다는 점이에요.
- 예를 들어 자동차가 팔렸다면 자동차만 재화에 해당하고, 자동차를 만드는 데 들어간 철강이나 고무 등은 재화에 포함하지 않습니다. 최종 상품의 가격에 모든 원자재와 부품, 인건비 등의 가치가 모두 포함돼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죠.
총합: 위에서 말한 최종 상품과 서비스의 생산량(거래량)에 시장가격을 곱하면 GDP가 산출됩니다.
10년 전으로 돌아간 한국 경제
‘경제가 성장했다’는 말은 곧 GDP가 커졌다는 말입니다. 시장의 규모가 커졌다는 말과 같아요. 그런데 지난해 우리나라 GDP는 세계 10위에서 13위까지 밀려났습니다.
GDP를 인구수로 나눈 1인당 GDP는 2021년 대비 8.2% 감소한 3만 2,142달러가 됐어요. 10년 전과 비슷한 수치입니다. 경제 규모가 10년 전 수준이 된 데는 수출이 부진했고, 환율이 높아진 탓이 크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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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DP는 시장의 미장센
물론 GDP를 통해 그 나라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어요. GDP가 포함하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전업주부의 재생산 노동은 GDP에 잡히지 않아요.
하지만 동일한 노동이라도 가사도우미의 노동은 GDP 집계에 들어갑니다. 시장에서 가격이 매겨지지 않으면, 시장 규모에 반영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GDP를 높이기 위해 경제활동을 해야 한다!’라고 외치는 사람은 없죠. GDP를 높이는 데도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게 아니라 대외 환경이 좋고, 각자 경제활동을 열심히 하면 결론적으로 커지거나, 낮아질 뿐이에요.
그럼에도 지난해 우리나라처럼 GDP가 빠르게 떨어진 상황이라면, ‘경제활동의 배경이 되는 시장 분위기가 크게 나빠졌으니,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겠구나’ 하며 추세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GDP는 시장의 미장센과 같으니까요.
“먼지 낀 창틀을 통해 과거를 볼 수는 있겠지만
모든 것은 희미하고 잡을 수도 없어요”
<화양연화>를 볼 수 있는 OTT
어피티의 코멘트
- 정인: 훌륭한 예술작품은, 특히 스토리텔링이 중요한 장르는 불안정하고 결핍이 많을 때 탄생하는 경향이 있어요. 아무래도 행복은 직접 즐기고 싶지, 간접적으로 접하면서 대리만족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인가 봐요. 2000년대 초반까지 홍콩 영화에는 명작이 많아요. 홍콩 경제가 아무리 좋아도 영국이 남겨두고 간 유산의 ‘현재’와 중국이라는 ‘과거’이자 ‘미래’ 사이에서 불안한 공기가 사람들의 뼛속 깊이 스며 있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