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ene #1.
진료도 약사에게
약도 의사에게?
옛날 의사: 라떼는 말이야~ 병원에서 약까지 다 지어줬어. 간호조무사가 처방에 맞게 약을 갖다줬다고. 굳이~ 약국 갈 필요가 없었지.
옛날 약사: 라떼는 약사들이 병원에 취직도 했었고 말야. 약사가 진료하고 처방전도 써줘서, 용하다는 약사는 의사보다 더 인기가 많았다고~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2000년, 의약분업의 캐치프레이즈입니다. 지금은 당연한 일이죠. 예전엔 의사가 진료도 보고 약도 지을 수 있었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약사가 진료도 보고 약도 지을 수 있었던 걸까요? 옛날엔 둘 다 가능했습니다.
일단 의사와 약사의 역할에 큰 차이가 나지 않았던 현장을 살펴볼게요.
1973년,
금정약국 사건
1973년 8월, 부산의 금정약국에서 조제한 감기약을 먹고 환자 세 명이 사망합니다. ‘침강탄산칼슘’을 ‘탄산바륨’으로 잘못 지어줬기 때문입니다. 침강탄산칼슘은 설사를 멎게 하는 약인데 탄산바륨은 쥐약으로 쓰이는 독극물입니다. 당시 사회에 대단한 반향을 불러온 사건이었지만 3심 끝에 내려진 최종 판결은 벌금 5만 원이었죠.
🎬Scene #2.
사건, 그 이후
어피티: 사람이 세 명이나 죽었는데 5만 원 내고 끝난다니 말이 됩니까?
옛날 약사: 당시 직장인 월급이 3만 원~4만 원 정도 했거든요. 5만 원이라면 지금으로 따져서 300만 원 전후 정도 될 겁니다.
어피티: 그래도 너무해요…!
옛날 약사: 사실 헷갈릴 만한 상황이라면 그럴 수도 있고. 약사에게 그 약이 이 약이 맞는지 시험해 볼 의무는 없거든요. 그걸 ‘관능시험’이라고 하는데, 하여튼 약사한텐 그 의무가 없어요.
어피티: 네? 약이 잘 쓰면 약이지만 잘못 쓰면 독이잖아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사건 내용보다는 배경입니다. 그러니까 당시에는 약사가 약을 직접 처방해서 팔고 있었다는 거죠. 양약뿐만이 아닙니다. 한약도 직접 처방하고 조제했어요. 오래된 약국에 들어가면 목재로 만들어진 한약 서랍이 보일 때가 있죠? 인테리어가 아니라 예전에 한약을 처방해줄 때의 흔적이랍니다.
너무 어려웠던
그때 그 시절
우리나라가 세계 최빈국에서 선진국이 됐다는 얘기는 전에서도 자주 언급했었죠. 단순히 경제 규모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라가 너무 못살면 각종 생활 인프라도 엉망이기 마련이니까요. 의료 서비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작년 기준,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약 3만 2천 달러였습니다. GNI가 1천 달러를 돌파한 시점은 1977년이었어요. 1950년대 전쟁통에서 1970년대까지는 약이 있기만 하면 감사히 먹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의사뿐 아니라 약사도 일반인에게 필요한 약을 직접 처방 조제해줄 수 있었어요.
문제는 당시 한국의 시대적인 상황 때문에 약사의 처방에 너무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예요. 어떤 조건에서 누가 어떻게 서비스를 할지 정리된 것도 없었고요. 이미 1960년대부터 의약분업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나왔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아직은 의사와 병원이 많이 모자랐거든요. 의료비가 비싸기도 했고요. 그러다 보니 생긴 부작용이 바로 약물 오남용입니다.
🎬Scene #3.
1960~1990년대
약물 오남용의 역사
어피티: 약국과 병원에서 누가 더 항생제를 잘, 많이 처방해주나 경쟁이라도 붙었나요?
옛날 약사: 그쵸. 환자들이 약을 많이 먹으면 더 빨리 낫겠지 싶어 했다고. 혹시 한외마약이라고 들어봤나요?
어피티: 마… 마약이요?
옛날 약사: 마약 성분이 아주 조금 들어가서 합법적으로 사용되는 마약을 한외마약이라고 해요. 지금도 감기약 같은 데 들어간답니다. 그런데 옛날엔 이런 한외마약을 엄청나게 많이 처방받아서 한 번에 왕창 먹곤 했어요.
어피티: 그걸 그렇게 한꺼번에 처방해주는 게 가능해요?
옛날 약사: 아니, 그걸 제한하는 법이 없었다니까요? 약국이든 병원이든 더 많이 처방해 줄수록 인기가 많았지… 수면제도 의사 처방 없이 주고 그랬어요.
문제가 심각해지자 정부는 의약분업을 실시해 일반 국민의 약물 오남용을 막기로 합니다. 의사 처방 없이는 약국에서 약을 살 수 없도록 하고, 의사는 자신이 처방한 약을 직접 팔 수 없도록 한 거예요. 꼭 의사의 진료를 받아야 처방을 해주니 약국이 맘대로 약을 팔 수도 없고, 의사도 아무리 약을 많이 처방해줘봤자 약값은 다 약국의 수입으로 돌아가니 일부러 약을 처방할 이유가 없겠죠.
여기까지만 보면 의약분업에는 약사가 더 반대했을 것 같기도 해요. 그간 갖고 있었던 처방 권리를 뺏는 거잖아요. 그런데 2000년에 실시된 의약분업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한 쪽은 의사였습니다.
의약분업 이슈가 경제 이슈이기도 한 이유가 여기서 나온답니다. 의사와 약사에게는 정부 보조금으로, 일반 소비자에게는 세금으로 느껴지는 의료보험 문제로 이어지거든요.
의료보험이 만든
의료비 체계
예전엔 의사가 받고 싶은 대로 의료비를 받았습니다. 그러다 1977년에 박정희 정부에서 의료보험(지금의 건강보험)을 만들면서 의료비에 체계가 생겼어요. 의료보험은 국민들이 평소에 낸 보험료를 기금처럼 관리하다가, 국민들이 필요할 때 의료비의 일부를 지원해주는 제도입니다. 이 제도로 평범한 사람들에겐 의료 접근성이 높아지고 의료비 부담이 줄어들었습니다.
병원과 의사에게는 손해였습니다. 의료보험이 병원이 달라는 만큼 보조금을 주지 않았거든요. ‘A라는 의료행위는 100원’. 이런 식으로 정부가 정해놓은 기준표가 있습니다. 쉽게 말해 ‘이 환자한테는 A랑 B라는 처치를 하고 C라는 검사를 했으니까, 기준표에 의하면 총 300원 나왔네? 그중 80%는 보험에서 내줄게. 20%는 환자가 내라고 해’ 이런 식으로 적용하는 거예요.
이 돈 주는 기준표를 ‘수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수가가 실제 진료비보다 상당히 낮은 편입니다. 무슨 소리냐면, 수가에는 A라는 의료행위가 100원이라고 정해놨는데 실제로 A를 할 때 드는 돈은 200원쯤 한다는 거예요. 여기서 두 가지 의문점이 생깁니다.
① 실제로는 200원인데 왜 수가에 100원으로 적혀있냐고요?
② 그럼 병원이 손해 보는 100원은 어떻게 하느냐고요?
①(실제로는 200원인데 왜 수가에 100원으로 적혀있냐고요?)은 이렇습니다. 정부는 의료보험을 만들면서 의사와 병원이 ‘의료 서비스를 얼마에 파는지, 그래서 얼마를 버는지’ 조사했습니다. 그걸 알아야 정부가 세금으로 몇 퍼센트 보조해줄 건지 정할 테니까요.
🎬Scene #4.
실제로는 200원,
수가는 100원?
정부: 이제부터 의료보험 만들 거거든? 의사 너네 의료행위별로 돈 얼마 드는지 말해봐.
의사들: (솔직하게 얘기하면 세금 많이 내야 하겠지?) A는 150원 들어요.
정부: 그래? 그럼 A 할 때는 이제부터 100원 정도만 받아.
의사들: 네?!
정부: 50원 정도는 손해 볼 수 있잖아.
의사들: (사실 100원 손해인데)
요즘에도 지하철 상가에서 옷 한 벌이라도 사려고 하면, 현금으로 계산해야 10% 깎아준다고 하시잖아요. 예전에는 카드 쓰는 세상도 아니고 현금 쓰는 세상이었는데 좀 더 줄여서 말해도 정부가 알 도리가 없습니다. 당시 의사들도 비슷한 입장이었습니다. 금액을 줄여서 얘기했어요.
그런데 정부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버립니다. 의사가 말한 금액에서 강제로 더 깎아버려요. 이것 때문에 보조금 비율이 무척 낮게 잡히는 근본적인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②(그럼 병원이 손해 보는 100원은 어떻게 하느냐고요?)는 이렇습니다. 의료비에서 보조금을 깎였으니 의사들이 약이라도 많이 팔아서 약값 보조금을 받기로 한 거예요. 약값이라고 해도 순수 약값이 아니라 인건비나 기타 비용이 포함된 비용이에요. 그래서 약값의 30%만 환자가 내고, 70%는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보조해줍니다. 그럼 약을 많이 팔수록 인건비나 기타 비용에 해당하는 돈이 많이 들어오겠죠?
다시 시작된
의약분업 논의
🎬Scene #5.
1993~2000년
기나긴 의약분업 갈등
정부: 약 팔기 경쟁이 붙으니까 말이야, 국민들은 약을 남용하고 건강보험 재정에 타격이 커. 지금이야말로 미뤄뒀던 의약분업을 해야겠어. 진료는 의사가, 약은 약사가!
의사들: 그러면 수가라도 제대로 올려주시죠?
정부: 수가? 그래, 어디 제대로 한 번 따져보자. 그럼 병원에서 제공하는 의료서비스 비용구조 다 까봐!
의사들: 비용구조 공개하면 올려줄 거야?
정부: 수가 올리려면 건강보험료도 올려야 되는데… 국민들이 동의하면 할게!
의약분업의 가장 큰 이유는 약물 오남용과 ‘수가’로 대표되는 건강보험 재정 악화에 있습니다. 건강보험 재정 악화는 지금도 해결되지 않았답니다. 재정이 곧 고갈된다는 경고가 계속되고 있죠.
‘수가’를 올리려면 결국 직장인이 건강보험료를 더 내야 합니다. 건강보험료를 함부로 올렸다간 다음 선거 때 정권 다시 못 잡을 수도 있겠죠. 결국 정부는 의대 정원을 10% 줄여서 병원의 시장경쟁을 완화하는 것으로 타협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지금의 병원-약국 관계가 이렇게 생겨났죠.
건강보험료,
얼마까지 내실래요?
요즘처럼 의료 분야에 전 국민의 관심이 뜨거웠던 적이 없습니다. 전 세계적인 코로나19 감염증 사태에 공공의대 설립과 의대 정원 증원안을 둘러싼 갈등이 포털과 뉴스와 SNS를 온통 뒤덮고 있죠. 지금의 의료계 대란도 뿌리는 ‘수가’에 있습니다. 의사 입장에서는 ‘현재 의료계 문제를 해결하려면 다른 정책 내놓지 말고 저수가부터 해결해라’라는 의견이 크거든요.
그렇다면 ‘수가를 올리면 되지 않느냐’라고 하기엔, 우리가 내야 할 건강보험료가 오릅니다. 그래서 이번 사태에서도 내 입장을 분명히 하려면 ‘내가 건강보험료를 어디까지 더 부담할 의지가 있는지’부터 정해야 합니다.
또 건강보험료를 더 낼 의지가 있다고 해도 적절한 수가를 책정하기 위한 통계가 아직 부족합니다. 병원이 원가 공개에 소극적으로 나오고 있거든요. 사실은 이 부분이 가장 먼저 해결되어야 할 문제예요. 건강보험료를 내는 입장에서, 투명한 근거를 기준으로 보험료가 정해져야 흔쾌히 돈을 내겠죠?
1977년에 시작된 시스템 문제가 2000년 의약분업과 2020년 의료대란을 통해 반복되고 있답니다. 적절한 비용을 내고 적절한 서비스를 주고받을 수 있도록,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논의가 이뤄져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