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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떼는 상한 우유가 더 딜리셔스했어

글, 정인

Photo by Mehrshad Rajabi on Unsplash

기후변화로 인한 물가 상승부터 도쿄올림픽의 경제적 여파, 반도체 가격 전망, 분기별 실적 발표, … 경제뉴스란을 보면 ‘큼직한 이슈’ 한두 개가 세상을 뒤흔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죠. 

하지만 비교적 주목을 끌지 못할 뿐, 우리의 경제생활에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꾸준히 뉴스를 만들어내는 주제도 있습니다. 낙농업계 뉴스가 그중 하나죠. 지난 머니레터에서는 남양유업이 불매운동을 못 이기고 매각을 선언한다거나, 우유 원유 가격 인상에 대한 뉴스를 소개하기도 했어요

오늘 <라떼극장>에서는 시간을 잠시 돌려서, 낙농업계와 관련된 큼직한 옛날 이슈를 차례로 이야기해볼게요. 먼저 ‘우유는 신선하게 유통되어야 한다’라는 상식이 영화 <대부>의 모델로 유명한 ‘알 카포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부터 한 번 들어보세요.

마피아는
신선한 우유가 마시고 싶어

🎬 Scene #1. 1930년대, 알 카포네의 전성기

알 카포네 친척: 화장실에 아무도 들어가지 마! 으악!

알 카포네: 쟤 왜 저렇게 종일 화장실만 들락날락해?

알 카포네 부하: 상한 우유를 드셨답니다.

알 카포네: 냄새만 맡아도 아는 걸 굳이 왜 마시니? 신선한 거 새로 뜯지. 아니면 얼른 사 오라고 시키든가.

알 카포네 부하: 지금 신선한 우유를 드시려면 목장에 가셔야 해서…

알 카포네: 왜? 식품매장에는 냉장고 없어? 우리집엔 냉장고 없어? 우리집 고용인들은 배달 온 거 냉장고에 넣는 것도 못 해?

우리나라에서 냉장고가 집집마다 하나씩 있는 보편적 가전이 된 건 1980년대지만, 1870년대에 산업용 냉장고가 대중화됐던 미국과 유럽에서는 1920년대 후반 즈음엔 냉장고 없는 집이 없었죠. 이런 상황에서, 당시 어마어마한 부자였던 알 카포네는 ‘우유가 상했다’라는 사실에 화가 나기 시작합니다. 총에 맞을까 봐 무서웠던 부하가 얼른 대답했죠.

알 카포네 부하: 처음부터 우유가 상해서 오는걸요! 여름에는 멀쩡하게 배달되는 우유가 없어요!

그렇습니다. 

미국에서는 19세기에 우유 배달이 일상화됐지만, 냉장 유통 같은 건 없었습니다. 20세기가 된 지 30년이 지난 1930년대까지도 목장 손수레에 담긴 병 우유들이 집집마다, 식품매장마다 직접 배달됐어요. 심지어 집집마다 매일 우유를 한 병씩은 마시는 커다란 소비시장이었는데도 말이죠.

그럼 최소한 매장에서라도 상한 우유는 팔지 말아야 했던 거 아니냐고요? 

지금이라면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당시 뉴욕에서 상한 우유에 대한 청문회가 열렸을 때, 뉴욕 의원이 “아이들한테는 신선한 우유보다 상한 우유가 더 좋아요”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정치인이 이런 발언을 할 정도면 실상은 어땠겠어요. 우유 상인들은 밀가루나 계란을 넣어서 상한 냄새만 가리면 됐습니다. 때로는 석회를 타기도 했죠. 그래서 사람들이 우유를 먹고 급사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어요.

알 카포네: 우리 애들이 돈 한 푼 건지겠다고 목숨 걸고 불법적인 일을 하는 동안, 우유 파는 놈들은 놀면서 날로 먹었네? 우유로 사람 죽여도 감옥도 안 가고 말이야.

‘Meadowmoor Dairies’라는 우유생산업체를 인수한 알 카포네는 시카고 정부에 로비해 우유 포장마다 유통기한을 새겨야만 한다는 법을 통과시킵니다. 추가예산을 들이거나 조직적인 생산·유통체계를 조직하기 어려웠던 다른 업체들을 따돌리려는 전략이었지만, 덕분에 미국의 우유 유통 체계는 혁신을 이루게 되죠. 

명령 전달 체계가 확실한 마피아들이 얼마나 일사불란하게 생산과 유통 프로세스를 실행에 옮겼겠어요. 게다가 이전까지 불법적으로 술을 만들어 팔아왔던지라 술 운반하던 냉장유통체계까지 이미 갖춰져 있었습니다. 요새는 다른 식품에도 유통기한이나 소비기한이 표시되어 있는데, 모두 여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라고 해요.

우리나라에 우유가
처음 유통됐을 때

그럼 우리나라에 우유가 처음 유통되기 시작할 무렵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조선시대까지 우리나라에서 우유는 음식에 첨가하거나 익혀서 먹는 보양식이었습니다. ‘사람이 송아지도 아닌데 소젖을 빼앗아 먹어야 한단 말이냐’라는 유교적 사상이 지배적이었고, 젖소를 사육하기가 어렵기도 했어요. 그래서 일제강점기에 일본 사람들이 서양식 식사의 상징인 우유를 마시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 Scene #2. 서양인처럼 키 크려고 우유를 마시오

일본 사람: 우유만 마시면 화장실에 가고 싶어요.

조선 사람: 동아시아인은 우유 소화 효소가 거의 안 나온다고요. 그냥 몸에 맞는 거 먹읍시다. 

일본 사람: 무슨 소리! 우유는 영양이 풍부해요. 서양 사람들처럼 키가 크려면 우유를 많이 마셔야죠!

당시 일본은 ‘탈아입구(脫亞入區)’라며,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 같은 선진국이 되자는 국가적 목표가 있었습니다. 키와 체격 같은 외모도 그런 목표 중 하나였어요. ‘서양인과 외모가 비슷해지려면 일단 비슷한 식품을 먹어야 한다’라는 생각으로 대표적인 서양 음식인 우유를 장려하기 시작했죠. 당시 일본의 지배 아래 있던 조선도 영향을 받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왜 서양의 대표적 음식이 우유였을까요?

미국 사람: 우린 19세기에 이미 목장 직배송으로 집집마다 우유가 있었다니까요? 상한 우유였지만.

조선 사람: 송아지 먹이를 뺏어먹는 것도 모자라서 상하게 놔두다니!

미국 사람: 진정하시고, 우유를 많이 생산하도록 개량된 홀스타인종을 드릴 테니 어린아이들 우유 좀 마시게 해줍시다.

서양 사람들은 물처럼 마시는 우유를 조선 사람들은 ‘송아지 먹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1890년대 처음 서양인들이 우유를 권장했을 때, 우리나라 사람들의 거부감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고 해요. 심지어 모유가 나오지 않아 젖을 먹지 못해 굶는 어린아이들에게도 우유를 먹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 Scene #3. 분유 원조받습니다

1960년대, 전쟁을 거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가난한 나라에서 어린아이들에게 가장 쉽고 빠르게 줄 수 있는 고영양·고열량 식품이 바로 ‘우유’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실제로 유니세프 등 국제원조기구에서는 당시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파괴된 나라들에 우유 원조 사업을 활발하게 펼쳤어요. 우리나라도 20년간 가루우유인 분유를 지원받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 정부: 이거, 언제까지 공짜로 주는 거 입 벌리고 기다리기만 해야 하냐.

우리나라 관료: 역시 식량은 자급자족이 최고죠. 먹을 것 갖고 불안한 거 지긋지긋합니다.

우리나라 정부: 젖소 달라고 해. 우리가 키워서 우리가 우유 짜 먹겠다고.

1965년, 우리나라는 일본이 식민지 시기에 대한 보상으로 빌려준 돈 일부로 젖소 육성 사업을 하게 됩니다. 1973년에는 매일유업이 최초로 젖소를 수입해오기도 하죠. 이 모든 게 우유로부터 나오는 분유 자급자족을 위해서였는데요.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실시했던 ‘우유급식’도 이 사업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사업은 성공적이었고, 효과도 좋았습니다. 특정 브랜드의 커피우유에만 쓰이는 삼각형 모양 팩 아시죠? 당시에는 비싼 유리병에 넣는 게 아니라면 그런 포장이 주류였다고 해요. 

많이 필요한 건 분유인데 
경쟁력은 흰 우유뿐이라고?

낙농제품 중 가장 많이 쓰이는 제품은 바로 분유입니다. 보관과 유통이 쉬운 데다, 제과제품에 첨가할 때도 분유를 많이 사용하거든요. 어린아이들도 영양성분을 추가한 분유를 먹죠. 요새는 저출생 현상으로 분유 소비량도 뚝 떨어져 문제입니다만, 2002년에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도 우리나라 낙농업계가 파동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

🎬 Scene #4. 흰 우유 수요는 줄어드는데

우리나라 정부: 저기, 낙농업자 여러분. 죄송한데 지금 우유 재고량이 적정 재고량의 두 배거든요. 정부도 더 보관할 곳이 없어요.

낙농업자: 알았어요. 올해 짠 우유는 폐기할게요. 

우리나라 정부: 그런 말씀이 아니고요. 앞으로도 우유 수요는 줄어들 것 같은데, 유제품 수입은 늘어날 것 같거든요.

낙농업자: 국내 생산 자체를 적게 하라는 말씀이신데…

우리나라 정부: 단계적으로 줄인다 이런 건 너무 질질 끄는 것 같아서, 젖소들을 도축하는 게 어떨까 합니다.

말 그대로 흰 우유 수요는 점점 줄어드는데 수입산 유제품에 대한 인기는 막 높아지고 있던 시점이에요. 당시 외국산 프리미엄 분유에 대한 인기는 하늘로 치솟아서, 거의 명품 매장 오픈런 수준이었답니다. 시장 공급량을 강제로 조정해야겠다고 생각한 정부는 낙농업자들에게 젖소 도축 권고를 내렸어요. 

분유가 인기인데, 도대체 왜 젖소들을 강제로 도축해야 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냐고요? 기업형 낙농업에서 나오는 분유의 가성비 때문이었던 거죠. 

우리나라 정부: 수입산 분유가 엄청나게 싸요. 흰 우유를 그대로 유통하면 신선하니까 좋겠죠. 우리나라에서 짜낸 우유를 마시라고 마케팅이라도 할 수 있지만 각종 식품에 첨가되는 분유는 신선도 문제도 없는데 기업들한테 비싼 국산 우유를 쓰라고 강요할 수 있겠어요?

낙농업계에도
봄이 올까?

코로나19로 아이들이 등교 대신 원격수업을 하면서 우유급식이 중단됐죠. 그로 인해 낙농업계가 더 어려운 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쉬운 소식만 있는 건 아닙니다. 지난 20년간 우리나라 경제 규모도, 국내기업들의 기술력과 인지도가 성장한 덕분에, 우리나라 사람들의 분유 소비량은 줄어들었지만 국내기업들의 분유 생산량은 오히려 늘어났습니다. 분유 수출이 증가했기 때문이에요. 

마침 중국이 산아제한정책을 사실상 폐지하면서 중국의 수입 분유시장이 어마어마하게 커질 거란 전망도 나오고 있습니다. 또다시 힘을 내서 상품개발 등 기업활동을 해나간다면 세계 시장이 열릴지도 몰라요. 물론 그전에 효율성이 없어진 제도를 개선하고, ESG를 준수하며 기업 윤리와 관련된 이슈가 더는 생기지 않아야겠죠?

📚 <라떼극장>에 참고한 자료

  • 정세이·정경수·심춘수(건국대학교), 「우유시장의 불완전경쟁 구조」(2015), 농업경영·정책연구 제42권 제1호: 37-52
  • 안효진·오세영(경희대학교 식품영양학과), 「19세기 이후(1884~1938) 조선에서의 우유 및 유제품 수용과정 고찰」(2018), 한국식생활문화학회지 33(4): 363-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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