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인
📌 경제와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작품을 어피티가 소개한다? 네, 그렇습니다. <어피티 인생극장>은 드라마, 영화를 주제로 경제 이야기를 줄줄 떠드는 시리즈로 기획되었어요. 스포일러 없이 영화 추천도 받고 얼떨결에 경제상식도 얻어갈 수 있는 어피티 인생극장 시리즈,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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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영화, <화차(2012)>
장르: 미스터리, 스릴러, 서스펜스
추천인: the 독자
the 독자의 별점: ⭐⭐⭐⭐
“더 가면 안 돼요. 이제 다 끝났어. 이제 그래야 당신이 살아.”
영화 <화차>는 동명의 일본 원작 소설을 리메이크한 영화입니다. 일본에서는 자신을 지워가는 자발적 실종을 ‘증발(죠하츠)’이라고 하는데, 원작 소설은 증발을 소재로 하고 있어요. 경제 버블이 꺼진 직후가 배경이죠.
일본 소설이 우리나라 영화로 리메이크되면서 시대적 배경은 IMF 외환위기 이후로 바뀌었습니다. 어마어마한 빚을 떠안은 사람들이 고통에 시달리던 때였습니다.
강선영이 사라졌다
영화 <화차>의 주인공 장문호는 또 다른 주인공, 강선영과 예비 시아버지를 만나 결혼 허락을 받으러 가는 길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 결혼하기로 한 사이입니다. 문호의 아버지는 선영을 반대하지만 문호는 아랑곳하지 않죠.
그런데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선영이 감쪽같이 사라집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휴게소에 들러 커피 한 잔 사러 다녀왔을 뿐인데, 돌아와 보니 방금까지 조수석에 있던 선영은 말 그대로 ‘증발’하고 없어요.
요즘 같으면 얼른 경찰에 신고해 휴대폰 위치 추적이라도 해보련만, 이야기의 배경은 외환위기 직후라 그런 기술이 상용화돼 있지 않았습니다. 힌트는 화장실에 떨어져 있던 머리핀 하나뿐. 당황한 문호는 정신없이 선영을 찾으러 다닙니다.
나중에는 경찰에 실종신고까지 했는데, 이게 또 수상합니다. 집안에 지문이 하나도 안 남아 있는 거예요. 의도적인 도피가 아니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넌 도대체 누구니?”
선영을 찾아다니던 문호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됩니다. 결혼을 약속한 사람, 강선영의 이름이 사실은 강선영이 아니었던 거예요.
스릴러 서스펜스 영화이기 때문에 이것보다 더 자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문호는 보통 사람이라면 멈췄을 이 지점에서 계속해서 선영의 정체를 파고듭니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사실을 알아내게 되죠.
우리는 모두 과거를 짊어지고 살아갑니다
문학적인 표현이라기보다는 현실적인 표현에 가까워요. 나의 전공, 나의 배우자, 나의 첫 커리어, … 모두 과거의 선택이 만든 결과물이죠.
금융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출을 받으면 대출받은 만큼의 빚을 지고 살아가게 돼요. 그런데 빚을 너무 많이 지게 되어버렸다면?
게임 캐릭터라면 리셋하고 싶을 때 간단하게 삭제한 후 다시 만들면 되지만, 사람은 그럴 수가 없죠. 그러다 보니 문제가 생깁니다. 사회생활을 하며 재능을 펼쳐야 사회 전체에 이득이 될 만한 사람이 빚에 묶여 제대로 된 경제활동을 할 수 없게 되는 거예요.
인생에는 연습이 없고, 100% 실전이라고 하지만 그 ‘책임’이 결과적으로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이 있어요. 아무리 냉정한 자본주의 사회라고 해도 성실한 경제주체가 한계에 몰리면 다시 기회를 주는 것이 모두를 위해 나은 결정이라고 여기죠.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대출의 늪에 빠진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 몇 가지 장치를 만들었습니다. 영화도, 인생극장의 딴 얘기도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파산 선고, 그리고 면책
‘신용회복위원회’에서 파산·면책의 정의를 가져와 볼게요.
“자신의 모든 재산으로도
채무를 변제할 수 없을 때
채무의 정리를 위해 파산을 신청하고,
파산절차를 통해 변제되지 못한 채무는
면책을 구하는 법적 제도”
‘파산’은 파산 신청인의 전 재산을 공평하게 나누어 채권자에게 나누어주는 과정입니다. 현실에서는 ‘빚잔치’라는 말을 더 자주 사용해요.
이 과정이 끝나면 빚잔치를 하고도 다 갚지 못한 채무를 면제해 주는 재판이 시작됩니다. ‘면책’이라고 하죠. 남은 채무를 면책받지 못하면 신분만 파산자로 바뀌고, 여전히 빚 독촉에 시달려야 하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개인파산은 면책 결정을 받아내기가 쉬운 편이 아니었습니다. 변호사 사무실 광고 중에는 개인파산에서 면책 결정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 사례가 많다는 내용이 꽤 많이 보이곤 했어요. 지금은 예전보다 면책 결정이 수월하게 나온다고 해요.
파산자 신분이 되고 나면
채무자는 개인파산을 하고 나면 ‘파산자 신분’이 돼요. 신분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공식적인 경제활동이 상당히 제한됩니다.
파산자는 일단 공기업과 공무원을 포함해 각종 취업 제한에 걸리게 됩니다. 경찰이나 교육공무원은 파산 선고를 받기만 해도 공무원 신분을 유지할 수 없어요. 자영업을 할 때도 업종별 제한이 생기죠.
대출을 받거나 은행에 새로운 계좌를 개설할 수도 없고, 신용카드를 발급받는 등의 금융거래가 어려워져요. 금융거래 측면에서는 보호자 없이는 중요한 결정을 할 수 없는 미성년자와 유사한 상태가 되는 거예요.
이렇게 일상적인 경제활동이 곤란한 수준이라서, 파산자가 감당해야 하는 불이익 내용만 들으면 ‘도대체 이걸 왜 하나’ 싶기도 해요.
그것이 사회에도 도움이 됩니다
빚을 독촉하는 추심을 개인이 장기간 견디기는 어렵습니다. 이자에 이자가 붙으며 갚아야 하는 채무는 계속해서 늘어나게 되죠.
파산자 신분이 되면 각종 제약이 많지만, 성실하게 살며 신용을 복구하면 언젠가는 다시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거예요.
자본주의 체제는 호황과 불황을 반복하는 싸이클을 특징으로 하는데, 거시적인 경기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경제적 사정도 마찬가지예요.
어려운 시기에 재조정할 수 있도록 해주지 않으면, 활발한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경제주체가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순간의 어려움이 평생을 결정하도록 놔두는 것은 건강한 사회가 아니기도 하고요.
회생과 워크아웃이라는 선택지도
비슷한 제도로 회생, 워크아웃도 있지만 분명히 달라요. 채무 원금과 이자를 싹 다 없는 것으로 해주는 제도는 파산·면책입니다.
내 소득으로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원리금을 줄여주는 제도는 회생과 워크아웃인데, 소득이 적을 때는 회생이 유리하고, 소득이 높은 편일 때는 워크아웃이 유리합니다.
개인회생과 워크아웃은 조정된 금액이든, 조정된 기간이든 빚을 갚기는 갚아야 해요. 나의 모든 금융거래와 기존 재산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파산만큼 극적인 장치는 아니에요.
우리나라에서는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겪으며 휘청인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가 많아요.
외환위기 때는 신용불량자가 236만 명이나 발생했는데, 그중에는 연대보증을 서줬다가 무너진 사람도 11만 명에 달했어요. 정부가 이후 연대보증을 따로 빼서 워크아웃 등으로 구제하기도 했습니다.
선영이 그렇게 도망 다닌 이유
개인파산은 법적으로 정해진 기간이 지나면 다시 신청할 수 있어요. 팬데믹이 휩쓸고 지나간 지난 4년간 개인파산 재신청 비율이 지속적으로 증가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기도 합니다.
2019년에는 전체 개인파산 신청자 중 4.46%였던 파산 재신청자가 2022년에는 5.52%로 늘어났어요. 법조계에서는 개인회생과 개인파산 신청자를 대상으로 금융교육, 신용교육을 확대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어요.
영화 속 ‘선영’은 타의로 등 떠밀린 비극 속에서 계속 도망치게 됩니다. 외환위기로 빚더미에 앉은 가정에서, 막대한 빚을 지게 된 안타까운 케이스예요. 영화를 보며, 내가 선영이었다면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행동해서 문제를 해결했을지 생각하며 감상하셔도 재미있을 거예요.
더 가면 안 돼요. 이제 끝났어. 그래야 당신이 살아.
<화차>를 볼 수 있는 OTT
어피티의 코멘트
- 정인: <화차>와 분위기가 비슷한 한국 영화로 <해빙>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해빙>이 더 취향이었어요. 위에서 소개해 드린 <화차>는 일본 원작과 느낌이 상당히 달라요. 콘텐츠의 만듦새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에서 비슷한 일이 발생 가능한가에 대한 이야기인데, 일본 같은 경우에는 ‘죠하츠’라고 불리는 ‘신분 세탁하기’가 있어서 훨씬 있을 법하게 느껴지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