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이 닥치면 그제야 보험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설계사 입장에선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상황과 마주하면 마음이 무거워요. 보험은 이미 발생한 사고에 대해서는 보상하지 않으며, 사고 이후엔 일시적 혹은 영구적으로 가입이 어렵기 때문이에요. 그렇다고 보험설계사의 양심에 반하는 방식으로 가입을 유도하거나 지레 겁을 주는 공포 마케팅은 제가 10년 가까이 설계사로 일하는 동안 가장 지양해 온 일이에요.
보험, 그냥 가입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요? 병원에서 단순히 검사를 받은 것뿐이고, 검사 결과 이상이 없다는 말을 들었어도 당장 보험 가입이 안 되거나 관련 서류를 통해 증빙을 해야 인수가 되는(가입이 가능한) 등 까다로운 과정이 필요할 수 있어요. 이는 보험 심사의 기본인 ‘고지의 의무’ 때문이에요.
보험계약자 또는 피보험자는 보험 계약 체결 시 보험사에 중요한 사항을 성실히 알려야 하는 의무가 있어요. 보험사는 이를 바탕으로 계약 조건과 보험료 수준, 보장 내용 등을 결정해요. 보험계약자가 고지 의무를 위반할 경우, 보험사는 보험금 지급을 거절하거나 계약을 취소할 수 있어요. 이미 납입한 보험료를 돌려주지 않을 권리도 있죠.
단순 검사라 해도 보험 가입의 가장 기본 조건인 최근 3개월 이내 진단 및 치료 이력이 없어야 한다는 조항에 걸릴 수 있고,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면 어떤 의심이 들었다는 뜻이 되기 때문에 검사만 받아도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KCD)가 주어집니다. 말이 좀 무섭죠? 간단히 말하자면 질병코드(진단명) 기록이 남아요.
질병에도 코드가 있어요 KCD란, 질병을 질환별로 분류해 각각의 고유 번호를 매긴 것으로 영문과 숫자로 이루어진 코드예요. 이렇게 분류한 질병분류코드를 의사가 판단하에 각각의 환자에게 적절히 부여해요.
세계보건기구(WHO)의 국제질병분류(ICD)를 기준으로 작성된 KCD는 질병 및 기타 보건 문제를 대분류 22개, 중분류 267개, 소분류 2,093개 등으로 세분화했는데요. 보험사는 보험에 가입한 피보험자에게 발생한 사고 보험금을 지급해야 할 때 KCD를 기준으로 지급 여부를 판단해요.
만일, 소비자가 위의 통증을 느끼고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을 경우 심각한 질병이 아니었어도 검사 항목의 근거로 KCD가 주어지며, 약 처방까지 받았다면 처방전에도 질병코드는 기재가 되는 것이죠. 다만, 감기와 같은 경미한 질환으로 7회 미만의 통원 정도는 보험 인수에 크게 문제 되지 않으니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고지의 의무 위반을 방지하기 위해 실손 보험 등의 청구 기록은 전 보험사가 공유하게 되어있어요. 내가 알리지 않아도, 보험사가 추후 다 확인할 수 있다는 뜻이죠. 그래서 과거에 보험금 청구 시 발급받은 서류의 병명을 확인한 후, 보험사에 내용을 정확하게 고지하는 게 필요해요.
보험 가입 시에는 고지 항목을 꼼꼼하게 살피세요 문제는 KCD가 무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데다, 몇 달 혹은 몇 해 전 병원에 간 걸 기억하지 못하거나 다르게 기억하는 경우가 있다는 건데요. 고의로 위반하려는 의도가 없었어도 가입자가 고지하지 않은 내용을 보험사가 알면 불이익이 생길 수 가입 시 고지 항목을 꼼꼼하게 살펴야 해요. 설계사는 보험 가입의 1차 ‘언더라이터(보험심사자)’가 됩니다. 온라인 전용 다이렉트 보험은 약관을 안내할 보험설계사가 없으니 가입시 더 꼼꼼하게 살펴야 해요.
보험설계사로 일하는 제게 큰 교훈이 된 경험이 있습니다. 경력이 오래되지 않았을 때, 한 가입자로부터 보험 가입 문의를 받고 상담하러 갔어요. 보험 청약을 위해 고지 의무 사항을 고객과 함께 작성하던 중 ‘2년 내 연속 7회(7일) 이상 치료 유무’ 항목에서 치료가 5회를 넘지 않은지만 확인했어요. 이후 보험금 청구 중 손해사정사(보험사고 발생 시, 손해액과 보험금을 산정하는 전문가)의 보험조사가 있었고 그 과정에서 동일 질환 7회가 확인되어 곤혹을 치른 적이 있어요.
물론 가입자도 설계사도 의도적으로 기록을 속인 것이 아니었고 초과 횟수가 애매해 보험은 취소되지 않았지만, 그렇게 결론 날 때까지 오랜 시간과 큰 노력이 필요했어요. 기억이 아닌 정확한 기록을 중요시해야 한다는 교훈을 깊이 새긴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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