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인문학][라떼극장] 파란 하늘 위로 훨훨 날아다녔죠 🛬



올 한해, 항공사에 대한 뉴스가 많았습니다. 

코로나19로 시작된 항공업계의 침체와 항공사 간 인수협상전 무산,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대한항공(한진그룹)의 아시아나항공 인수 소식까지. 

참 다사다난한 한 해였죠. 


매년 휴가철마다 해외 여행지를 찾던 분들에게도 아쉬웠던 1년이었나 봅니다. 

최근 들어 ‘랜선 여행’이라는 키워드로 과거의 해외여행 사진을 공유하는 문화가 유행할 정도니까요


그런데 말이죠. 비행기를 타고 전 세계를 자유롭게 방문하는 게 그렇게 오래전부터 가능했던 일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사람들이 제한 없이 해외여행을 갈 수 있게 된 건 1989년부터거든요.



🎬 Scene #1. 


옛날 사람: 라떼는 말이야~ 비행기 타고 해외여행 가려면 나이가 반백살 이상이어야 했어~


<라떼극장>, 오늘의 주제는 ‘해외여행과 항공업계의 역사’입니다. 

다시 해외여행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그 날을 기다리며, 지난 이야기를 찬찬히 살펴보아요. 



여권만 있어도

행복했던 시절


우리나라는 1982년까지 일반인의 해외 출국을 금지했습니다. 

일부 고위직이나 부유층이 특별한 목적이 있을 때 제한적으로 다녀오는 것만 허용됐고, 평범한 사람들은 아예 관광 여권을 발급받을 수 없었어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① 외화 유출 방지, ② 북한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의 공작원과의 접촉 우려 때문이었죠.



🎬 Scene #2. 


옛날 정부: 외국에 나가면 외국 돈을 써야 하는데, 은행에서 관광에 돈 쓰라고 달러를 바꿔줄 여유가 없어요.

어피티: 어차피 다들 못 살던 시절이었다면서요. 자유롭게 놔둬도 갈 수 있는 사람 많지 않았을 텐데요?

옛날 정부: 해외에 다녀오면 뭐가 좋은데요?

어피티: 외국 문화를 접하면서 경험도 넓히고, 시야도 넓어지고, 우리와 다른 기준을 가진 사람들도 볼 수 있죠.

옛날 정부: 글쎄요. 북한 공작원을 만나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어 오는 경험을 더 많이 하게 될걸요? 해외에 우리나라 사람을 노리는 북한 공작원이 얼마나 많겠어요?

어피티: 그래도 모든 사람의 해외여행을 제한하는 건 좀...

옛날 정부: 무슨 일이 생길지 어떻게 알아요? 반공 사상으로 무장하고, 신분이 높은, 믿을 만한 사람 중에서 ‘국가에서 추천한 사람’만 해외여행 다녀올 수 있습니다!


이때는 공무 등 확실한 사유가 있는 사람에게만 여권을 발급해줬습니다. 

그나마도 까다로운 신원조회를 거쳐야 했고, 반공연맹이 주관하는 소양교육도 받아야 했어요. 

교육 이수자에게는 ‘나는 대한민국을 대표한다’란 제목의 소책자를 나눠줬는데, 국제 에티켓과 공산권 주민 접촉 시 유의사항 등이 담겨있었답니다. 



80년대에

해외여행을 가려면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정부가 해외여행 자유화에 대해 검토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대부분의 집에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있고 인터넷 이용이 활발하던 시절이 아니었습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외국인을 보거나 외국어를 접할 기회가 없다가, 갑자기 외국 관광객들이 몰려오면 국민들이 얼마나 당황하겠어요.


연령과 재산에 기준을 둔 ‘제한적 해외여행 자유화’가 그렇게 시작됩니다. 일반인이 해외여행을 목적으로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게 된 건 1983년부터입니다. 

50세 이상 국민에 한해, 200만 원을 은행에 1년간 예치하는 조건으로 연 1회 관광여권을 발급해줬어요. 

당시 과장급 월급이 50만 원이던 걸 고려하면, 네 달 치 월급을 맡겨놔야 1년에 한 번 해외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던 거죠.


1987년 9월부터는 관광여권 발급 최저연령이 45세 이상으로, 1988년에는 40세 이상으로 낮춰졌습니다. 

그러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뒤에는 연령제한이 철폐됩니다. 


이렇게 관광 목적의 여권 발급이 자유로워지면서, 해외여행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었습니다. 

얼마 전, 대한항공과 합병 절차를 시작한 아시아나항공도 해외여행 자유화에 따른 1980년대 후반, 수요 증가를 대비하려고 만든 민간 항공사랍니다. 



저비용항공사,

해외여행 시대를 열다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가 추진됐다고 다들 해외여행을 마음껏 다닌 건 아닙니다. 

해외여행을 다닐 수 있을 만큼 부유한 가구가 아직 그리 많지 않았고, 티켓값도 부담스러웠어요. 그러다 변화의 시점이 찾아옵니다.


1987년 민주화 당시 GDP순위 18위였던 우리나라는 2002년 11위까지 올라왔고, 2000년대 초반에는 세계적으로도 호황기였습니다. 

전에 없던 경제 성장기를 지나는 동안, 소비 욕구가 뿜어져 나오면서 해외여행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기 시작했어요. 

이때 등장한 게 바로 ‘저비용항공’(Low Cost Carrier)입니다.


원래 항공산업은 아주 비싼 산업입니다. 공항 건설비에 운영비, 항공기 구입비, 유지 및 보수비, 항공기 관련 전문인력, 항공기에 들어가는 연료비에 공항 근처의 인프라 구축비 등 매년 수백억 원의 고정비용이 발생하거든요. 저비용항공은 이 비용구조를 혁신적으로 바꾼 새로운 모델이었습니다.

 

① 기내서비스를 최소화하거나 유료화하고

② 공항 서비스도 최소화하고

③ 단거리 운항 위주로

④ 티켓을 인터넷으로 판매해서 오프라인 매장 운영비도 없고

⑤ 항공기는 단일기종으로, 성능은 비교적 낮아도 효율적인 기체로 운행하고

⑥ 최대한 승객을 꽉 채워서 많이 운행하는


방식을 도입했죠. 2019년까지 저비용항공의 전 세계 항공시장 점유율은 국내선 32%, 국제선 14%까지 차지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넘쳐나는 해외여행에 대한 수요를 저비용항공이 받아내면서, 해외여행은 빠르게 확산됐습니다. 그간 우리나라 관광객에 대한 평판도 높아졌습니다. 

2019년 기준, 우리나라 여권으로 비자 없이 갈 수 있는 나라는 170개국입니다. 전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수준이에요. 

해외에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신뢰도가 높다는 뜻이죠. 


이렇게 우리나라 여권지수가 높아지고, 이전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해외를 다녀올 수 있게 된 건 2005년~2010년 사이에 가능해졌습니다. 

해외여행 자체가 모두에게 당연했던 시절이 고작 10~15년밖에 안 된 셈이에요.



더 싼 곳이 이긴다,

항공업계의 치킨게임


코로나19로 항공업계가 큰 타격을 입었다고는 하지만, 사실 그 전부터 분위기는 좋지 않았습니다. 출혈경쟁이 심해지면서 치킨게임이 되어가고 있었거든요.



🎬 Scene #3.


항공사 사장님: 저비용항공 진짜 성장세가 엄청 나네요? 우리도 하나 세워야겠어요!

어피티: 괜찮으실까요? 이미 저비용항공이 15개나 있는데…

항공사 사장님: 치킨게임 모르세요? 이 판에서는 먼저 양보하는 사람이 지는 거예요. 남은 사람이 다 먹는 구조라고요. 일단은 저가 출혈경쟁으로 밀어붙어야 합니다!

어피티: 괜찮을까요? 우리나라는 인구 5천 만 밖에 안 되는 시장인데…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당연히 안 괜찮죠(?)


저비용항공사의 저렴한 가격공세에,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은 많은 승객을 빼앗겼습니다. 2018년 전 세계의 저비용항공사 수송분담률은 50%에 달했어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08년에 국제 금융위기가 발생했고, 2009~2010년에는 신종플루가 돌았고, 2015년에는 메르스가 유행했고, 2016년엔 한한령이 내려지면서 한국과 중국 사이가 얼어붙었습니다. 2019년에는 일본산 불매운동으로 항공사들은 비상경영을 했던 상황이었죠. 물론 여기서 이득을 본 사람이 없는 건 아닙니다.



🎬 Scene #4.


어피티: 다들 적자라면서, 대체 누가 이득을 봤죠?

항공사들: 저렴한 가격에 해외여행 다닌 항공사 고객들이죠.


수요공급 법칙에서 ‘공급자들이 가격경쟁을 하면 소비자후생이 증가한다’라는 경제학 이론이 있습니다. 

항공여객 시장에서는 여행을 많이 다닌 소비자가 시장에서 가장 이득을 본 사람이었죠. 


하지만 앞으로는 소비자 입장에서 지난 몇 년처럼 풍요로운 이익을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코로나19가 끝나더라도 많은 항공사가 망해서, 더이상 출혈을 입으면서까지 가격 경쟁을 할 필요가 없어졌으니까요.


게다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합병하게 되면, 소비자후생은 줄어들 전망입니다. 

장거리 노선에 취항하는 대규모 항공사가 하나뿐이라면, 경쟁할 필요 없이 마음대로 티켓값을 정할 수 있을 테니까요. 

한진그룹 회장이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하면서 요금 인상을 하지 않겠다’라고 선제 방어를 했지만, 끝까지 가봐야 아는 일입니다.



저비용항공도

흔들흔들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인수합병은 저비용항공에도 큰 영향을 미칠 거예요. 어쩌면 코로나19보다 더 타격을 줄 지도 모릅니다. 안 그래도 출혈경쟁 때문에 위태로웠는데, 이번에 두 대형 항공사가 합병하게 되면 각 자회사 저비용항공사들인 진에어와 에어부산, 에어서울도 함께 합병돼 대형 저비용항공사가 탄생하게 되거든요.


다른 나라는 어떨까요? 세계의 대형 항공사들이 감원감축과 구조조정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지금 저가 항공사들은 오히려 규모를 늘리고 있다는 소식도 있습니다물론 그것도 일부 항공사 소식일 뿐입니다. 유럽 최대 규모의 저비용항공사 ‘플라이비’ 역시 파산을 신청할 정도였으니까요.


1988년 올림픽을 계기로 빠르게 늘어난 해외여행 수요, 가격구조를 개선한 저비용항공의 탄생, 치킨게임 승리를 위한 저비용항공의 출혈경쟁, 저비용항공에 파이를 뺏긴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코로나19의 타격, 국내 대형 항공사 간의 인수합병 이슈까지.


오늘은 지난 30년간 우리나라 항공업계에 있었던 일들을 간단히 정리해보았습니다. 

쉴 틈 없이 변화해오던 항공업계가 과연 이번에는 어떤 모습으로 변하게 될까요? 

소비자의 시선을 넘어, 더 넓은 시각으로 이 업계를 지켜보는 것도 필요한 시점입니다.


📚 <라떼극장>에 참고한 자료

  • 장성저 석사학위논문, 「한·중간 저가항공산업의 경쟁전략 비교분석」(2019), 부산대학교 대학원 경영학과
  • 양재필·박상범, 「항공산업의 역사적 고찰 및 향후 전망」(2013), 「경영사학」제28집 제4호(통권 68호), 경영사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