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적인 발명가의 ‘생활 속 다시 쓰기’ 아이디어를 엿보세요


글, 정우람솔 발명가

📌 코너 소개: ‘쓴생님’은 ‘돈 잘 쓰는’ 방법을 넘어서 ‘마음’과 ‘시간’, ‘물건’ 등 ‘쓰다’의 쓰임새를 조금 더 다양한 삶의 영역으로 확장한 코너예요.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함께 우리 삶에서 마주하는 모든 ‘쓰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통적인 소비 방식을 대체하는 방식


안녕하세요, 잘쓸레터 독자 여러분! 저는 100년 후에도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고자 하는 발명가 정우람솔입니다. 생업으로는 개인부터 스타트업, 중소기업의 제품 개발을 돕는 프리랜서 제품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케이블타이, 지퍼, 벨크로처럼 작지만 꾸준히 쓰이고, 앞으로도 사용될 제품을 선물처럼 세상에 남기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대량 생산 시대가 되면서 우리는 필요한 것이 있으면 제품을 사서 해결하는 게 당연해졌어요. 하지만 애드호시즘(Adhocism)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에게 즉흥적인 창의력만 있다면 굳이 새 물건을 살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죠. 


영어 단어인 ‘Ad-hoc’은 ‘특별한 목적이나 필요에 의해 즉흥적으로 만들어지거나 일어나는 것’을 의미해요. 미리 계획하지 않았지만, 상황에 맞춰 즉석에서 해결책을 찾는 방식을 말하죠. 예를 들면, 갑자기 비가 와서 우산이 없을 때 신문지로 머리를 가리거나 캠핑을 갔는데 병따개가 없어서 숟가락으로 맥주병을 따는 것도 ad-hoc한 해결 방식이죠.

출처: 캠브리지 영어사전


제가 오늘 소개할 ‘생활 속 다시 쓰기’는 이런 임시방편적 접근이 전통적인 소비 방식을 대체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진행한 석사 연구에서 시작되었어요.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소비하고 있는지, 제가 있었던 영국을 사례로 말씀드려 볼게요. 2020년 기준으로 영국에서는 1인당 매년 무려 98.66kg의 플라스틱 폐기물을 만들어내고 있어요. 더 충격적인 건 이 중 9%만이 재활용된다는 거죠. 


택배 물량을 보면 더 실감이 나는데요. 영국은 전 세계에서 1인당 택배 수령이 가장 많은 나라라고 해요. 1년에 한 사람당 74개의 택배를 받고, 매초마다 160개의 택배가 배송된다고 하죠. 이런 소비 패턴이 앞으로 얼마나 지속 가능할까요? 우리가 정말 이 모든 물건들이 필요해서 구매하는 건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더라고요.


이런 현상은 실제 제 주변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는데요. 당시 유학생들이 공부하는 동안 구매했던 생활용품들이 학업이 끝나면서 대부분 버려지는 걸 보게 됐어요. 빨래 건조대, 조명, 의자, 식기 등 꼭 필요한 물건들인데, 1년 정도 쓰고 버리기엔 너무 아깝잖아요? 빌리거나 중고로 구매할 수도 있지만, 단돈 몇 만원에 새 제품을 집 앞까지 받을 수 있는 세상이다 보니 새 물건을 사는 게 너무나 당연해져 버렸죠.


떠날 걸 알면서도 필요한 물건을 샀던 유학생들이 이 정도인데, 우리는 얼마나 많은 물건을 사고 있을까요? 하지만 우리에게 정말 ‘제품’ 자체가 필요한 걸까요? 빨래 건조대가 아니라 빨래를 널 공간이, 조명이 아니라 책상을 밝힐 빛이 필요한 건 아닐까요? 이런 생각에서 아이디어가 떠올랐죠. 새로운 물건을 사지 않고도 우리의 필요를 채울 방법은 없을까? 이미 가진 물건에 새로운 기능을 더할 순 없을까?


주위를 둘러보니 우리는 이미 그렇게 살아가고 있더라고요. 의자는 때때로 옷걸이나 빨래 건조대가 되어주죠. 두 개를 마주 보게 놓으면 이불도 말릴 수 있고, 전구를 바꿀 때는 사다리로도 쓰이고, 문을 고정할 때도 요긴하게 씁니다. 여행용 캐리어는 손님이 오면 어느새 의자나 테이블로 변신하고, 침대 밑에 두면 훌륭한 서랍이 되어주죠. 숟가락은 또 어떤가요? 아마 많은 분들이 숟가락으로 맥주병을 따본 경험이 있으실 거예요.

출처: 정우람솔 님


이렇게 보니 우리는 이미 충분한 자원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연구를 시작했죠. 영국에서 유학생활을 막 시작한 50명의 집을 방문해서 물건들을 창의적으로 사용하는 방법과 대체 가능한 필요를 살펴보았습니다. 유학생들이 공통으로 가진 물건을 분석하고, 이것들을 새롭게 조합해 쓸 수 있는 Ad-hoc Product(임시방편 제품) 개념을 개발하게 되었어요.


예를 들어 볼게요. 욕실에 샤워볼, 치약, 샴푸 등을 걸어둘 수 있는 수납용 행거가 필요하신가요? 그럼 포크 두 개만 준비하세요. 포크를 행거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서로 연결할 수 있는 커넥터가 필요한데요. 저는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와인병, 포크, 냄비 같은 규격화된 제품들을 서로 연결할 수 있는 커넥터를 디자인했습니다. 이 커넥터는 FDM 방식의 3D프린터로 쉽게 출력할 수 있게 만들었고, 100% 재생 필라멘트를 써서 다시 필라멘트로 되돌릴 수도 있죠. 모든 Ad-hoc Product 커넥터의 3D 파일은 누구나 무료로 다운받을 수 있도록 오픈소스로 공개했습니다.

출처: 정우람솔 님


저는 환경운동가도,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도 아니에요. 다만 모든 사람이 창의적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안에 잊고 있던 창의성만 깨운다면, 소비를 줄이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예요. 물건을 사기 전에 이미 가진 것으로 해결할 방법을 찾아보면 어떨까요? 그래도 방법이 없다면, 그때 사도 늦지 않아요. 소비를 줄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우리가 물건에 휘둘리지 않고 물건을 잘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좋은 물건을 추천하는 사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서로 좋은 해결 방법을 나누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제게는 한 살 된 조카가 있는데요, 제 안경을 손에 쥐면 안경알을 문질러 소리도 내보고, 안경다리를 입에 넣어 맛도 보죠. 안경이 뭔지 모르니까 이렇게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어른이 된 우리도 안경을 듣거나 맛볼 수 있을까요? 조카처럼 사물을 바라보면서, 만든 사람이 정해 놓은 기능을 넘어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창의적인 시각을 되찾았으면 좋겠습니다.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라는 말이 있죠. 저는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제품을 남기고 싶습니다. 이를 위해 여러 사람들과 아이디어를 나누고, 우리의 생활 방식을 연구하고 있답니다. 새로운 방식으로 물건을 사용하는 아이디어를 인스타그램을 통해 공유받고 있어요. 매일 다양한 정보를 업데이트하고 있으니,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있는 잘쓸레터 독자님들이 계시다면 오셔서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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