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인
📌 경제와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작품을 어피티가 소개한다? 네, 그렇습니다. <어피티 인생극장>은 드라마, 영화를 주제로 경제 이야기를 줄줄 떠드는 시리즈로 기획되었어요. 스포일러 없이 영화 추천도 받고 얼떨결에 경제상식도 얻어갈 수 있는 어피티 인생극장 시리즈,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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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영화, <써니(2011)>
장르: 코미디, 드라마
추천인: the 독자
the 독자의 별점: ⭐⭐⭐⭐⭐️
“우리 중 한 명을 건드리는 건 우리 전체를 건드리는 거야.”
영화 <써니>는 주인공 ‘나미’가 중년이 된 모습을 비추며 시작합니다. 나미는 중산층 전업주부입니다. 햇살이 잘 드는 널찍한 아파트에서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하고, 사춘기가 온 딸을 달래 등교시켜요.
나미에게는 집안을 돌보는 것 말고도 할 일이 있습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친정엄마를 위로하러 가는 일이죠. 어느날 친정엄마를 보러간 병원에서, 나미는 우연히 고등학교 동창 ‘하춘화’를 만나게 됩니다.
춘화의 병실에서 둘은 눈물의 재회를 합니다. 몇 마디 안 나눴지만 춘화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걸 알 수 있었죠. 춘화는 죽기 전 마지막 소원이라며 나미에게 부탁합니다. 죽기 전에 여고 동창들을 딱 한 번만 다시 만나고 싶다고 말이에요.
이 시점에서 영화는 과거로 돌아갑니다
70~80년대의 디스코&펑크 스타일로 차려입은 소녀들이 학교 복도를 왁자지껄하게 채우고 있어요. 빨간 쫄바지에 엄청나게 부풀린 파마머리, 과감한 원색 줄무늬가 그려진 니트까지. 안 그래도 떠들썩한 여고의 복도에서 알록달록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옵니다.
실제로 1983년부터 1980년대 말까지는 교복 자율화 기간으로 교복이 없었습니다. 모두들 사복을 입고 등교했어요. <써니>의 주인공들은 한 번도 교복을 입어본 적이 없는 1970년대 초반생이죠.
장미, 진희, 금옥, 복희, 수지, 그리고 춘화
전라남도 보성 벌교 출신 여고생 나미는 서울로 전학을 왔습니다. 워낙 긴장을 많이 하는 성격인데, ‘서울말’을 하면서 잘 보이려 하다가 오히려 실수하고 말아요.
이때 통 크게 나미를 받아주며 학교의 ‘인싸’ 무리로 확 끌어들여준 사람이 바로 춘화입니다. 춘화를 중심으로 뭉쳐 있는 친구들이 바로 중년 춘화가 죽기 전에 꼭 한 번 다시 만나고 싶다는 그 친구들입니다.
너무 달라진 우리네 모습
the 독자: 학창 시절에는 다 같은 학생이니까 비슷비슷한데, 나이 들어서 다시 만나면 서로 사는 모습이 너무 다를 것 같아요. 그러면 추억으로 간직하는 것만 못한 상황이 되기도 하잖아요.
정인: 아니나 다를까, 그게 사실이었어요.
전업주부 나미와 사업가 춘화의 현재 모습에는 비슷한 점이 요만큼도 없습니다. 다른 친구들도 각자 특징이 뚜렷한 삶을 살아가고 있어요.
하지만 친구들의 우정과 의리는 어른이 되어 겪은 풍파나, 서로 달라진 가치관을 뛰어넘을 만큼 강했습니다. 물론 재결합 과정을 거쳐야 하긴 했지만요.
영화는 바로 그 재결합 과정을 신나게 그리고 있어요. 어렵게 사는 친구는 도와주고, 친구를 괴롭히는 나쁜 놈이 있으면 응징하면서 말이에요.
현실에서는 어렵지 않을까?
the 독자: ‘우리 중 한 명을 건드리는 건 우리 전체를 건드리는 거야!’ 어린 시절 날렸던 이 대사를 어른이 되어서 진짜로 보여줬네요.
정인: 쉽지 않은 일이죠. 어른이 되면 잃을 게 많으니까요.
the 독자: 그치만 영화로 보니까 속 시원하지, 현실에서 누군가 잃을 것 없다는 듯이 마음대로 해버리면 주변이 완전히 초토화되지 않을까요?
정인: 그랬던 적이 있어요. 바로 우리나라에서요. 엄청나게 잘나가던 회사가 열흘 만에 망해버린 사건이기도 하죠.
영화도, 인생극장의 딴 얘기도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프로스펙스를 기억하시나요
나미와 춘화가 여고생이던 1980년대 초중반, 우리나라에는 ‘국제그룹’이란 이름의 대기업이 있었습니다. 재계 7위에 계열사는 스무 개가 넘었어요.
이 회사는 신발 등 경공업 소비재를 팔아 돈을 벌었습니다. 당시 국제그룹이 만들었던 신발 브랜드를 들어보면 익숙하신 분들이 많으실 거예요. 바로 ‘프로스펙스’입니다.
이 브랜드가 얼마나 유명했던지 1984년 미국에서는 전미 농구협회(NBA) 산하 하부리그인 CBA 공인 농구화로 지정되기도 했습니다. 영화 <써니>에서도 누가 프로스펙스 운동화를 신었네 마네 하면서 감탄하는 장면이 나오죠.
1980년대, 국제그룹은 당시 미국 현지 브랜드를 인수할 만큼 잘나갔습니다. 아디다스나 나이키에 밀리지 않고 경쟁하고 있었어요.
그랬던 기업이 열흘 만에 망했다고요?
1981년 프로스펙스 브랜드를 런칭한 국제그룹은 1947년, 일제강점기 해방 직후 부산을 기반으로 일어선 기업이었어요. 하지만 주거래은행인 제일은행이 국제그룹의 어음 결제를 모두 거절한 1985년 2월, 열흘 만에 파산하게 됩니다.
당시 우리나라 기업들은 비즈니스를 할 때 어음으로 결제하는 관행이 있었습니다. 21세기 들어서도 어음결제 관행이 해결되지 않아서 문제였어요.
어음 결제란 물건 대금을 곧바로 주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 돈을 주겠다’고 정해놓은 증권을 대신 주는 거예요. 그리고 어음에 적혀 있는 ‘언제’는 최소 3개월 후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평균 결제 기간이 106일이 넘었으니까요.
결제 업체가 대금 지급을 미루는 동안 납품업체가 경영 악화로 부도를 맞아 대금 지급 의무가 없어지기도 하는 등 부작용이 심했습니다.
2018년 점진적 폐지 방안이 발표되어 지금은 많이 축소되었는데, 외환위기 이전에는 대기업이라고 해도 어음 지급 관행이 예외는 아니었어요.
은행: 결제 대금? 어… 음…
은행이 어음에 해당하는 돈을 내주지 않기로 한 것이니 국제그룹은 물론, 국제그룹에 받을 돈이 있었던 하청업체와 거래처들도 연쇄적으로 부도를 맞습니다. 바로 두 달 전에 은행과 정상적인 어음 결제 처리를 합의한 국제그룹으로서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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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다 힘센 사람이 있었네
the 독자: 아니, 은행이 그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해도 돼요? 법적으로 문제가 될 텐데요?
정인: 나라에 법보다 더 힘이 센 사람이 있으면 그렇게 되죠.
독재 정권이 끝난 직후 열린 비리 청문회에서 밝혀진 증언을 살펴볼게요. 아래 기사에 나오는 ‘일해재단’은 독재자의 호를 딴 장학재단 이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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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이후 밝혀지는 사실들
이후 국제그룹은 갈가리 찢겨, 우리가 아는 프로스펙스는 한일그룹에 인수되었다가 LS그룹에 매각돼요. 지금은 LS네트웍스가 프로스펙스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국회와 검찰은 제5공화국 비리를 대대적으로 조사했는데, 위에 언급된 청문회 등에서 국제그룹 해체에 대한 사실이 드러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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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그룹 이야기는 독재 정권 아래서 기업 경영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보여줍니다. ‘내 기분을 건드리면 국가를 건드리는 것과 같은 거야’라는 협박을 받으면서는 회사를 끌고 나가기가 아무래도 곤란하지요.
언제나, 불확실성이 무서운 것
<써니>는 홍콩, 베트남, 일본, 인도네시아, 중국 등 우리나라와 정서가 비슷한 아시아 지역에서 리메이크되며 세계적인 성공을 거뒀습니다.
판타지 속에서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어떠한 이해관계도 없이 순수하게 사귀고 친해지던 시절의 친구가, 힘든 현실 속에 짠! 하고 나타나 그때의 순진한 우정으로 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 말이에요.
하지만 그럴 수 있는 힘이란 얼마나 거대한지. 그런 거대한 힘이 현실에 실제로 존재하면, 대개 화풀이에 쓰인다는 게 문제겠죠. 사람 기분이 얼마나 잘 변해요.
그러니까 현실 속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불확실성(uncertainty)’을 피해보도록 해요.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오히려 단점이 확실한 사람은 괜찮아요. 비슷한 상황과 조건에서 딱 예상한 실수를 할 테니까요. 그것은 ‘위험(risk)’이라고 해서, ‘헷지(hedge)’ 할 수 있는 요소로 여겨진답니다.
갑자기 경제용어가 나왔죠? 맞아요. 경제뉴스를 읽거나 투자를 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언제나 불확실성이 제일 무섭답니다.
<써니>를 볼 수 있는 OTT
어피티의 코멘트
- 정인: 다들 중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어떻게 지내고 계시나요? 인터넷 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한 고등학교 때 친구들은 SNS를 통해서 쉽게 근황을 알 수 있는데, 인터넷이 그만큼 활발하지 않았고 아직 많이 어렸던 중학교 때 친구들과는 연락하기가 어렵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