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를 모르는 기업, TSMC

글, 서영민

이번엔 TSMC 이야기예요. 하지만 이 이야기를 하려면, 엔비디아부터 언급하지 않을 수 없어요.


망할 회사를 살려낸 힘

엔비디아는 원래 게임용 그래픽 칩을 만들던 회사죠? 게임 마니아들 사이에선 ‘지포스’ 시리즈로 잘 알려졌고, 1993년 스타트업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창업 3년 만인 1996년, 거의 망할 뻔했어요. ‘NV2’라는 새 칩을 거의 다 만들어놨는데, 그만 윈도우95라는 새로 등장한 운영체제와 호환이 안 되는 바람에 출시가 무산됩니다. 투자금도 다 썼는데, 제품은 없는 상황이었던 거죠.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젠슨 황 CEO는 일본의 세가(Sega)라는 게임회사를 찾아가 간절히 부탁한 끝에 투자금을 받아냈습니다. 원래 NV2를 사주기로 했던 회사였거든요. 당시 세가에서 투자금을 끌어오지 못했다면 엔비디아는 역사에서 사라졌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1997년, 심기일전해 출시한 새 제품이 대박을 터뜨립니다. 이후 폭풍 성장하는데요, 2007년까지 10년 동안 성장률은 매년 70%에 달했습니다. 그 결과 매출은 무려 200배가 됩니다. 2025년의 매출은 2007년의 40배예요. 그러면 1997년의 8,000배죠.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


젠슨 황은 이 성공을 자신의 공으로만 돌리지 않아요. 대신 TSMC 창업주 모리스 창 덕분이라고 수차례 언급했죠. 1997년 엔비디아 성공의 시작점에 있는 제품부터 지금까지 엔비디아의 모든 최신 칩은 TSMC 공장에서 나왔거든요. 그런데, 제조 기업이 설계대로 물건을 납품해 준 것이 왜 그렇게 고마웠을까요? 


우선 스타트업은 공장을 지을 돈이 없어요. 설계를 해도 만들 수가 없죠. TSMC 같은 회사가 도와주지 않으면 시장에 진입 자체를 할 수 없어요. 그뿐인가요? TSMC는 요구만 하면 생산량을 탄력적으로 조정해줍니다. 100개 주문 들어오면 100개, 갑자기 1만 개 주문이 몰리면 그만큼 뚝딱 만들어줘요. 10만 개, 100만 개도 문제 없습니다. 엄청난 돈을 들여 대규모 생산을 감당할 수 있는 ‘공장 능력’을 미리 갖춰놨으니까요.


불량 걱정도 없어요. 불량에 대한 책임도 TSMC가 떠 안아요. 고객은 설계만 잘하면 되고, 제조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만하면 고마울 만한가요?


처음엔 TSMC도 대단치 않은 회사였어요. 남(갑)이 만든 설계대로 만들어주는 ‘을’의 위치, 쉽게 말해 하청이었죠. 사실 위탁제조는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한 선택이었어요. CPU는 인텔, 메모리는 삼성… 이미 강자가 있으니 이쪽으론 못 들어가고, 그러니 남의 설계를 받아 위탁제조하는 ‘파운드리’ 사업을 택한 거예요.


하지만 행운이 있었어요. TSMC의 고객들이 IT 혁신을 주도하는 엄청난 기업으로 성장한 거예요. 엔비디아도 그 중 하나고요. 고객들이 성장하자 그들의 제품을 생산하는 TSMC도 뒤이어 각광을 받게 됐죠. 물론, 행운만 따랐던 것은 아닙니다. 이번엔 애플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네요. 


우리와 거래하면 불량은 없습니다

애플이 최신 아이폰에 들어갈 AP(Application Processor) 제조를 TSMC에 맡겼는데, 초기 생산에서 문제가 생겼어요. 난리가 났죠. 새 아이폰이 못 나오게 생겼으니까요.


TSMC는 설계를 다시 살펴보고, 애플에 말합니다. “문제가 생겼어요. 그리고, 원인을 파악했어요. 쿠퍼티노(애플 본사)에 우리 엔지니어 50명 보낼게요. 우리가 해결해 줄게요.” 그리고 실제로 해결했습니다. 설계를 고치고, 칩을 성공적으로 생산해냈어요.

 

제게 이 얘기를 들려주신 반도체 분야 석학께서는 중국 출장 중에 IBM 출신의 미국인에게 이 이야기를 듣고 큰 충격을 받으셨다고 해요. 잘잘못을 따지고 다시 설계를 해오라고 하는 대신 직접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서는 건 한국적 관행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TSMC는 고객을 탓하지 않아요. 설계자의 실수도 자기 일처럼 해결합니다. 불량품 설계도를 받고 제대로된 제품 만드는 신비한 회사인 겁니다.


사실, 설계하는 사람들은 제조를 몰라요. 설계라는 건, 쉽게 말하면 컴퓨터 앞에서 하는 코딩이에요. 손에 기름 묻힐 일이 없는 일이죠. 공장에 가 볼 일조차 드물지 않을까요? 그들이 그린 설계도가 제조의 현장과 맞지 않는 상황은 얼마든지 생길 수 있어요. 


그러니 중간에서 조율하는 기업(디자인 하우스)이 필요하고, 만들어주는 쪽의 성의가 더 필요해요. TSMC는 이런 식으로 40년 넘게, 제조 현장을 모르는 기업들과 협업해서 수없이 많은 제품을 설계도보다 더 좋게 만드는 게 일상인, ‘파운드리 비즈니스에서 일이 되게 하는데 도가 튼’ 회사예요. 이제 TSMC가 왜 특별한지 감이 오시나요?

TSMC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기업들

미국의 쿠팡, 아마존을 아시나요? (쿠팡은 아마존의 전략을 따라하며 생긴 기업이니까 사실 반대로 표현해야 맞겠죠.) 아마존은 쿠팡의 50배에 달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온라인 쇼핑몰이지만, 사실은 반도체 설계 회사이기도 해요. 쇼핑몰이 왜? 싶으시겠지만, 다 이유가 있어요.


전 세계에서 쇼핑 데이터를 분석하고, 수요를 예측해 재고를 배치하려면 세계의 현장을 통합해서 관리할 엄청난 컴퓨팅 파워가 필요해요. 그래서 클라우드 서비스(AWS)를 시작했고, 이걸 더 잘하기 위해 반도체 만드는 이스라엘 팹리스(설계만 하는 회사를 fab(공장)이 없다(less)고 해서 fabless라고 불러요) ‘안나푸르나 랩스’를 인수했죠. 칩 설계만 하고, 제조는 TSMC에 맡겨요.


구글도 빠질 수 없죠. AI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강자로 꼽히는 구글은 2016년부터 자체 연산장치인 TPU(Tensor Processing Unit)를 개발했습니다. 처음부터 AI에 최적화된 연산장치로 출발했다는 점에서, 게임 그래픽칩으로 출발한 GPU보다 더 효율적이지 않냐는 평가를 받죠. 


테슬라는 자율주행과 슈퍼컴퓨터 ‘도조’용 칩을 직접 설계해요. 퀄컴은 스마트폰용 칩 ‘스냅드래곤’ 시리즈로 유명하죠. 메타는 최근에 우리나라 팹리스 퓨리오사를 인수하려 했었죠. 


결국, 요즘 잘나가는 IT기업은 죄다 반도체 칩을 ‘직접 설계’합니다. 만드는 건 TSMC에 맡기고요. 칩 산업은 왜 이렇게 변했을까요?


인텔이 놓친 자리를 TSMC가 메우다

한마디로 답하면 인텔이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인텔이 건재할 때는 맞춤형 칩이 필요가 없었어요. 인텔이 매년 내놓는 새 칩이 가장 좋은 솔루션이니까요. 그러다 인텔의 혁신이 느려졌죠. 기업들은 이제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 인텔 없이 자기 살 길을 찾아야하는 시대가 되었어요. 게임의 법칙이 바뀐겁니다.


모든 기능이 다 들어있는 인텔 CPU만큼 완벽한 칩은 못 만들지만, 대신 딱 필요한 기능만 담은 ‘슬림한 칩’을 설계하기 시작한 겁니다. AI 특화칩, 저전력칩, 자율주행칩… 하지만 아이디어가 있어도 제조를 못 하면 그야말로 아이디어일 뿐이고 몽상에 지나지 않겠죠.


이때 필요한 퍼즐 조각이 TSMC입니다. 믿을 수 있는 공정, 최신 기술, 설계보다 더 정밀한 제조 역량까지 갖춘 회사. TSMC가 있기 때문에 맞춤형 칩이 현실이 된 거예요. TSMC는 단순히 ‘운이 좋은 회사’가 아닙니다. 혁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존재죠.


이제 반도체 세계는 ‘팀워크’의 시대입니다. 아이디어를 내는 회사, 설계만 전문으로 하는 회사, 설계와 제조를 이어주는 디자인하우스, 포장·검사 등을 담당하는 OSAT 기업들까지. 수 많은 회사들이 생태계를 이루고, 이 자체가 ‘파운드리 비즈니스 모델’이에요. 그리고 이 모두를 아우르는 중심에 TSMC가 있습니다.

📌 필진 소개: KBS에서 금융, 재정, 국제경제 기사를 주로 써요. 그러니까 전공은 ‘대한민국 경제’예요. 기삿거리를 찾던 어느날, 국가대표 삼성전자에서 ‘근본적 위기 신호’를 감지했어요. 이후 ‘칩’을 파고들었어요. 삼성전자를 주제로 크리스 밀러, 짐 켈러 같은 세계적 칩 명사를 등장시킨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큰 반향을 일으켰고, 여세를 몰아 《삼성전자 시그널(2025)》을 썼어요. 시대의 흐름을 읽어드립니다. ‘빠져들게 만드는 스토리텔링’을 추구합니다. 읽는 재미와 깊은 인사이트, 둘 다 담아서 여러분을 찾아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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