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걸 & 핑크 필라테스 프린세스, 이제는 타이어드걸? 소녀들은 되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

“전 사람이 여유가 있는지 없는지를 볼 때 머릿결과 구두를 보거든요.” 

쿠팡플레이 드라마 <안나> 속 주인공 유미(수지 분)의 대사예요. 드라마 전체를 관통하는 대사는 아니지만 그 자체로 깊은 인상을 남겨 많이 회자되곤 했어요.


유미는 ‘있는 집 딸’의 신분을 훔쳐 살아가는 인물이에요. 여간해서는 잘 보이지 않는 구두까지 신경 쓰되 너무 애쓴 흔적은 드러나지 않아야 하고, 자연스럽게 잘 관리된 머릿결처럼 태어날 때부터 우아했던 사람처럼 보여야만 인정받을 수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유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죠.


드라마를 보면서 유미의 그 한마디가, 최근 몇 년간 SNS를 휩쓴 ‘클린걸’이나 ‘올드머니룩’ 같은 뷰티 트렌드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문제는 이런 유행들이 많은 사람에게 새로운 숙제를 안겨주고 있다는 점이에요.

출처: 헤일리 비버 인스타그램

올드머니룩과 클린걸, 타고난 우아함을 흉내 내는 시대

‘올드머니룩’은 독자님들도 한 번쯤 들어보셨을 거예요. 수십 년간 자산을 축적한 부유층의 스타일을 말하죠. 화려하진 않지만 품격 있는 클래식한 패션을 추구하며, 로고는 크게 드러나지 않게 숨기되 캐시미어나 실크 같은 고급 소재의 옷을 입을 입어 고급스러움을 표현하는 식이에요.


최근 유행하는 클린걸과 올드머니룩 두 트렌드가 추구하는 방향은 다르지만, 닮은 점이 있어요. 바로 타고난 피부, 타고난 여유, 타고난 우아함처럼 ‘가지고 태어난 것’을 선망한다는 거예요.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하죠. 노력하지 않고 타고나길 우아하게 보이기 위해 실제로는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니까요.


팬데믹 이후 마스크 착용이 일상화되면서 자연스러운 피부 표현에 대한 수요가 늘었고, 재택근무가 많아지며 미니멀하게 꾸미는 스타일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어요. 이 덕분에 2022년에는 눈썹을 가지런히 정돈하고, 잔머리 하나 없이 젤로 넘긴 슬릭백 번 스타일, 피부에는 색조 없이 글로우한 질감을 연출한 메이크업이 유행했죠. 이른바 ‘클린걸(Clean Girl)’ aesthetic의 시작이었습니다.

출처: Rhode


이후, 클린걸 트렌드에 불을 지핀 건 헤일리 비버였어요. 헤일리는 클린걸의 의인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데요. 저스틴 비버의 아내이자 모델로 유명해지자 자신의 스킨케어 브랜드 ‘로드(Rhode)’를 론칭하면서 ‘글레이즈드 도넛 스킨(glazed donut skin)’이라는 개념을 대중화했죠. 


설탕 코팅을 한 크리스피크림 도넛처럼 촉촉하게 빛나는 피부를 연출하는 메이크업을 선보였고, ‘글레이징 밀크’ 같은 에센스 제품도 함께 내놓았어요. 피부톤을 정리하고 하이라이터와 보습 오일로 얼굴에 광을 더한 뒤, 펩타이드 립 트리트먼트로 투명하고 촉촉한 입술을 연출하는 게 헤일리 비버 식 메이크업의 특징이에요. 빛이 나는 헤일리의 피부는 마치 타고난 것처럼 보여요. 물론 타고난 것도 있겠죠. 하지만 실제로 일반인들이 이러한 피부를 유지하려면 고가의 스킨케어와 레이저 시술 없이 따라가기 힘든 게 사실입니다. 그리고 헤일리처럼 보이기 위해서는 절대 저렴하지 않은 로드의 메이크업 제품을 계속 사야 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하죠.

핑크 필라테스 프린세스를 따라 하기 위한 스타터팩, 출처: 레딧


이어, 클린걸 트렌드는 점점 더 많은 요소를 필요로 하기 시작했어요. 그중 하나가 ‘핑크 필라테스 프린세스’ 열풍이에요. 파스텔 핑크의 레깅스와 스포츠 브라, 양말까지 톤온톤으로 맞춰 입고 우아한 필라테스 동작을 따라한 뒤, 거울 앞에서 OOTD 셀카를 찍는 거예요. 포인트는 땀 흘리는 모습이 사진에 보이면 안 된다는 점이죠.


자, 지금부터 이해하기 편하게 2025년을 사는 클린걸의 하루를 한 번 상상해볼게요.


아침에 눈을 뜨고 레몬워터를 마셔요. 젠틀 클렌저로 세안하고, 토너, 에센스, 비타민C 세럼, 히알루론산 앰플, 아이크림, 수분크림, SPF 50 선크림까지 꼼꼼하게 발라요. 컨실러로 잡티를 살짝 가리고 파운데이션, 크림 블러셔, 연한 립글로스로 마무리해요. 헤어는 슬릭백 번이나 포니테일로 정리하고 아보카도 토스트와 말차 라떼로 아침을 먹어요. 점심은 샐러드나 포케를 먹고요. 퇴근 후엔 핑크색 필라테스복으로 갈아입고 스튜디오로 향하죠. ‘오운완’ 거울 셀카도 빠질 수 없고요. 저녁은 집에서 직접 만든 그릴 치킨 샐러드나 연어 스테이크로 건강하게 마무리해요. 밤엔 오일 클렌저로 시작해 폼 클렌저, 토너, 에센스, 레티놀 세럼, 모이스처라이저까지 순서대로 바르며 하루를 마무리하죠.


우리나라에서도 ‘꾸안꾸(꾸민 듯 안 꾸민)’ 스타일은 이미 오래전부터 인기였지만 클린걸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 듯 보여요. 메이크업을 자연스럽게 하고 옷을 깔끔하게 입는 것뿐만 아니라, 삶 전체가 깔끔하고 정돈된 모습을 보여야 비로소 완성되거든요. 깔끔한 포니테일, 투명한 립밤, 말차 라떼를 마시며 필라테스를 하고, 미니멀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집에서 브이로그를 찍는 모습처럼요. 클린걸은 패션 스타일을 뛰어 넘어 이제는 하나의 라이프 스타일 트렌드가 된 듯해요,


이렇게 진화하기 시작한 클린걸 트렌드에는 모순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클린걸이 처음 등장했을 때는 ‘자연스러움’과 ‘미니멀함’처럼 기존에 요구되던 미의 기준에서 덜어내는 것이 핵심이었지만, 클린걸이 되기 위해 점차 더 많은 조건과 규칙이 생겨나고 있으니까요. 노력하지 않은 듯한 모습을 위해 더 많은 뷰티 제품이 필요하고, 건강하고 정돈된 삶을 연출하기 위해 더 많은 돈과 시간이 들어갈 수밖에 없어요. 30만 원짜리 피부 관리, 20만 원대 필라테스 회원권, 5만 원짜리 말차 파우더처럼요.


그리고 통통한 몸, 다크서클, 여드름 피부는 클린걸과 공존할 수 없어요. 아이를 키우는 엄마나 3교대로 일하는 간호사, 하루 종일 사무실이나 다양한 현장에서 몸을 바쳐 일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나이 든 사람도 클린걸의 이미지에서는 배제될 수밖에 없죠. 더러워지고 낡고 헤질 수밖에 없는 생활 속에서 클린걸 트렌드는 사람들의 체형이나 나이, 직장에서 얻은 피로까지 모두 ‘클린’하지 못하다고 간주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등장했습니다. 메시걸과 타이어드걸

클린걸 트렌드에 지친 사람이 적지 않은 모양입니다. 완벽하게 정돈된 모습을 연출하는 것이 피로해진 사람들 새롭게 찾기 시작한 스타일이 바로 ‘메시걸’과 ‘타이어드걸’이거든요.

타이어드 걸의 대명사 제나 오르테가의 모습, 출처: 제나 오르테가 인스타그램


용어는 다르지만 두 스타일은 비슷해요. 의도적으로 흐트러진 모습을 추구하죠. 삐져나온 머리카락, 번진 마스카라, 헝클어진 옷을 그대로 보여주고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브이로그에 담는 식으로 편안한 일상을 공유해요. 흐트러진 모습과 피곤한 얼굴을 일부러 드러내는 유행이 시작되었다는 건, 이제 많은 사람들이 지나친 완벽주의와 자기관리를 보여지기 식으로 연출하는 것에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다는 뜻이 아닐까요? 


누군가에게는 반가운 유행이 시작된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서도 아이러니가 있어요. ‘타이어드걸’과 ‘메시걸’을 표방하는 콘텐츠들도 사실은 그 나름대로 연출되고 있거든요. 다크서클이 드러나 보이도록 마스카라나 아이라이너를 번지게 만들어 메이크업으로 더 강조하고, 무기력하고 지친 모습도 가장 보기 좋은 각도를 계산해서 사진을 찍어요. 헝클어진 머리도 너무 엉망으로 보이지 않게 적당히 연출하고요. 지쳐보이기 위해서도 또다시 애써야 한다면, 그것도 너무 타이어드하지 않나? 싶긴 하네요.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건 어떠한 ‘걸’도 되지 않아도 괜찮은 자유가 아닐까요?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아가도 충분하다는 자신감 말이에요. 소셜 미디어에 넘쳐나는 ‘~걸’ 트렌드들 사이에서 다른 사람의 기준이 아닌, 내가 편안하고 행복한 모습 그대로 ‘나다운걸’이 될 수 있기를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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