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전성시대는 없다
자,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볼까요? 양자 컴퓨터 이야기요. 기억하시죠? 양자 컴퓨터가 오면 메모리가 필요 없어질지도 모른다고요. 양자 컴퓨터는 우리가 아는 컴퓨터의 근간을 이루는 폰 노이만 구조가 아니거든요.
우선 정보 처리 단위부터 완전히 달라져요. 기존 컴퓨터는 모든 정보를 0과 1, 즉 비트(bit)로 표현하죠. 그런데 양자 컴퓨터 세계엔 비트가 없어요. 그 대신 큐비트(qubit)가 있어요. 동시에 0이기도 하고 1이기도 한 상태(중첩), 여러 큐비트가 서로 영향을 주는 상태(얽힘)로 작동해요. 완전히 다른 원리죠.
그리고 무엇보다, 지난 80년간 지속되어 온 폰노이만 아키텍처, 즉 ‘머리’와 ‘손발’의 구분이 아예 없습니다. 큐비트가 머리인 동시에 손발이에요. 데이터를 저장도 하고 처리도 합니다. 워낙 빠르기 때문에 GPU처럼 도와주는 장치도 필요 없는 것 같구요, HBM은 전혀 필요없습니다.
세상은 또 한번 뒤집힐까?
양자 컴퓨터가 현실이 되면 기존 컴퓨터에 쓰이던 CPU, GPU, 메모리 모두 자리를 잃을 수 있어요. 엔비디아도, 하이닉스도 안심할 수 없죠.
대신 양자 컴퓨터의 세상에서는 화학과 기계공학이 더 중요해질 겁니다. 양자 컴퓨터는 온도가 중요해서 극저온 상태에서만 작동해요. 섭씨 영하 273도 가까운 온도를 유지하는 냉각 기술, 그 환경에서도 잘 버티는 소재, 정밀한 장비까지 완전히 새로운 생태계예요. 메모리에 특화된 한국 반도체 산업엔 낯선 세계죠. 두렵기만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양자컴퓨터 분야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진 연구자 가운데 한 분인 채은미 고려대 교수님께 이 걱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물어봤어요. 만약 미래에 양자 컴퓨터만 존재한다면 그럴 수는 있다고 하시네요. 다만, 그 미래는 그렇게 가깝지는 않다, 또 양자 컴퓨터는 모두가 한 대씩 갖는 컴퓨터가 아닐 것이다, 양자 컴퓨터는 서버의 형태로 클라우드 어디엔가 모셔두고 일반인들은 지금과 유사한 일반 컴퓨터를 사용할 것이다, 미래는 모르는 것이지만 양자 컴퓨터만 존재하는 세상은 현실적인 가정은 아니다, 라고 하셨어요.)
대한민국 반도체 칩 산업은 본질적으로 ‘메모리 비즈니스’라고 할 수 있어요. 선두가 삼성이건 하이닉스건 대한민국은 메모리라는 특정 칩을 만드는 데 탁월합니다. 그렇게 지금껏 잘해왔고 쌓아놓은 게 많다고 생각하니까, 지금과는 다른 미래의 가능성이 두려운 것이겠죠.
정말 세상은 또 한 번 뒤집힐까요? 이 질문에 답해가며, 칩 이야기를 조금 더 깊이 있게 나누려면 이번에는 반대로 관식이처럼 ‘변하지 않는 법칙’ 하나를 이해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법칙이 이미 소멸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고 주장하지만, 저는 지속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이 법칙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변화하는 반도체 세계의 본질과 그 속에서 경쟁하며 대한민국이 거둔 성취를 동시에 조망할 수 있습니다. 다음 연재에서 이어서 들려드릴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