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는 40년 만에 나타난 인플레이션을 제압하기 위해서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위원회(연준)와 행정부가 어떤 정책을 도입했는지 살펴봤습니다. 연준은 이례적인 속도로 기준금리를 인상했고, 팬데믹 이후 시행했던 여러 가지 경기부양책을 신속하게 거둬들였어요. 미국 정부 역시 각종 부양책을 하나하나 만료시키면서 연준과 보조를 맞췄죠.
그리고 이런 고금리를 기반으로 한 긴축 정책이 효과를 발휘하면서 미국의 실물 경기는 다소 둔화 양상을 보이게 되었고, 기승을 부리던 인플레이션 역시 차츰 숨을 죽이는 듯 보였습니다. 실제 22년 6월 9.1%까지 치솟았던 미국의 소비자물가지수는 23년 6월 3.0%까지 빠르게 안정이 되었죠. 그렇지만 그 이후에는 연준의 목표치인 2.0%까지 더 낮아지지 못하고 3.0% 내외에서 횡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2024년 8월 기준)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요?
물가 잡는 법에도 킬러 문항이 있다고요?
고등학교 때 100점 만점의 수능시험을 본다고 가정해 보죠. 여기서 90점을 넘으면 우리가 목표로 하는 좋은 학교를 갈 수 있는 겁니다.
홍길동이라는 학생의 점수는 3월 현재 30점입니다. 90점까지는 언감생심, 답이 나오지 않죠. 그런 홍길동이 앉은 자리에 풀도 안 나는 모드로 열심히 공부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매월 10점씩 점수를 올리기 시작했죠. 실제 7월 모의고사에서 70점까지 점수를 끌어올렸습니다. 이제 고지가 머지 않았네요. 매월 10점씩 오르는 셈이니 9월이면 90점을 넘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실제 수능이 있는 11월에는 110점까지 오르게 될까요? 이건 세상의 이치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생각일 거예요.
질문을 하나 드려볼게요. 30점에서 70점으로 올리는 게 어려울까요, 70점에서 90점으로 올리는 게 어려울까요? 당연히 후자일 겁니다. 왜냐하면, 그 유명한 ‘킬러 문항’이 있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70점 고지를 밟았다면 방심하면서 쉴 것이 아니라 더욱더 열심히 공부해서 계속 레벨을 올리기 위해 노력해야 해요.
물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물가가 다 빠지더라도 좀처럼 내려가지 않는 물가 끈적임의 끝판왕이 있죠. 바로 ‘임금과 임대료’입니다. 임금과 임대료는 오르기는 쉬워도 내려가는 케이스를 찾기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실제 미국의 상품 물가는 현재 디플레이션 영역에 들어왔다고 할 정도로 매우 좋아졌죠. 월마트나 타겟과 같은 유통업체들은 너무 높은 물가와 금리로 인해 소비가 둔화되고 있는 만큼, 회사의 마진을 갉아먹더라도 각종 상품에 대한 가격 인하에 나섰다고 하니, 미국의 상품 물가는 빠르게 안정될 거예요.
그렇지만 이런 상품 물가의 안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국의 임금은 전년 대비 4% 이상 오르고 있죠. 미국의 임대료 역시 사상 최고치를 연일 벗겨내는 미국 주택 가격에 힘입어 계속해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연준의 물가 목표가 2%라는 점을 감안하면 아직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다른 과목 점수 다 올라갔는데, 임금이라는 과목에서 성적이 전혀 오르지 않아 평균으로 90점을 만들지 못하는 상황. 지난해 빠른 안정을 보이던 물가의 개선도가 약 1년여 동안 주춤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예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 물가에 반영된다고요?
이외에도 한가지가 더 있죠. 금융 환경이 완화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금융 환경이 완화적으로 바뀌었다는 건 돈이 많이, 쉽게 풀릴 수 있는 환경이란 뜻이에요. 연준이 돈줄을 조여서 인플레이션을 잡았다고 했으면서 갑자기 왜 돈이 풀렸다고 하는지 앞서 말씀드렸던 홍길동의 비유로 계속해서 설명해 볼게요.
홍길동은 7월 모의고사 때 점수를 70점까지 올렸습니다. 너무나 자신감이 넘치는 상태죠. 하면 되는구나… 스스로에 대한 감동까지 밀려오는 겁니다. 매월 10점씩 올라가니 90점 넘는 것은 따놓은 당상으로 느껴집니다. 그럼 힘들게 공부할 필요가 있을까요? 90점까지 올라가는 것이 시간문제라고 느껴지는 상황에서 말이죠. 홍길동이 공부 안 하고 놀기 시작합니다.
다시 질문을 하나 드려볼까요? 지금부터 놀기 시작하면 홍길동의 점수는 90점이 될 확률이 높을까요, 되려 50점을 향하게 될 확률이 높을까요?
이런 비유를 하는 이유는 지금의 인플레이션 상황이 바로 이런 상태이기 때문이에요. 과거와 달리 금융 시장은 코로나 사태 당시 일어난 돈 풀기에 대해 워낙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돈을 풀기 시작하면 자산 가격이 크게 상승한다는 것도 알고 있죠.
그럼 금리 인하하기 전에 주식을 사야 할까요, 금리 인하한 다음에 주식을 사야 할까요? 네, 당연히 금리 인하 이전에 주식을 사들여야 수익이 날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주식과 자산을 사들이기 시작하죠. 그러다 보니 금리가 실제 인하되지도 않았는데, 주식 가격이 오를 만큼 올라서 금융 시장이 먼저 금리 인하를 시장에 선반영해 버리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인플레이션이 마저 잡히려면 그 돈이 이렇게 자산 시장에 풀리는 것이 아니라 저축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데, 시장에 기대가 선반영되다 보니 그 부분의 인플레이션이 잡히지 않고 있죠. 물가와의 전쟁, 그 한복판 클라이맥스에서 갑자기 완화적인 금융 환경으로 화악 바뀌게 된 것이죠.
금리 인하를 하기도 전에 시장이 알아서 금리 인하 기대를 자산시장에 반영하면서 주식 및 부동산 시장을 자극합니다. 자산 가격의 상승은 자산을 소유한 사람들의 소비를 늘려주는 효과가 있죠. 내가 보유한 집이나 주식의 가격이 크게 오르게 되면 사람들은 아무래도 과거보다 소비를 늘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가 잡기 막판 스퍼트는 통할까요?
이렇게 되면 연준이 물가를 잡기 위해 사용하는 두 개의 칼날이 무뎌지는 문제도 아울러 생기게 됩니다. 연준은 한 손에 고금리, 다른 한 손에 강달러(달러 강세)라는 칼을 들고 인플레이션이라는 괴물을 코너에 몰아넣고 있죠. 높은 금리는 사람들의 소비를 위축시키기 때문에 물가를 잡는 데는 특효약입니다. 그리고 강한 달러 역시 미국 입장에서는 수입 물가의 하락을 자극하기 때문에 물가 잡는 데 효과 만점입니다.
그런데요, 금리를 인하하지도 않았는데 금리 인하에 대한 기대를 자가발전으로 키우게 되면, 국채 금리 등 시장금리는 알아서 정책금리보다 먼저 하락하게 되죠. 그리고 달러 역시 금리 인하 기대를 머금으면서 큰 폭으로 하락하게 될 겁니다.
고금리와 강달러라는 두 개의 칼로 인플레이션을 난도질한 이후, 이제 마지막으로 인플레이션의 심장을 정조준하고 있는데, 금리 인하에 대한 성급한 기대감이 졸지에 약달러와 저금리로 바뀌는 겁니다. 그럼, 그로기 상태(강타에 맞아 비틀거리는 상태)에 있던 인플레이션이 다시금 눈을 뜨게 될 수 있죠.
실제 2022년 말 즈음 고금리로 인해 미국의 물가가 빠르게 안정되고 있을 당시 연준은 혹여나 고금리가 실물 경기의 침체를 낳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기준금리 인상의 속도 조절을 시사했던 바 있죠. 이때 연준의 금리 인상 스탠스 전환, 이른바 연준의 피벗 기대가 커지면서 순식간에 약달러 & 저금리로 시장 분위기가 크게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금리 인하 기대를 머금고 튀어 올라버린 자산 가격 역시 이런 분위기에 큰 힘을 실어주었죠. 실물 경기 침체는 피할 수 있었지만, 미국의 인플레이션은 쉽사리 2%에 도달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표류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던 겁니다.
90점 고지를 앞두고 막판 스퍼트를 하는 홍길동입니다. 기존보다 더욱 독한 마음을 먹고 배전의 노력을 기울여야 90점까지 올릴까 말까 하는데, 90점에 많이 다가섰다고 방심하고 놀기 시작하면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까요? 그래서 상당 수준 인플레이션이 개선되었다고 해도 아직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되는 겁니다. 느슨해질수록 인플레이션과의 싸움이 장기전이 될 수 있기 때문이죠. 다음 시간에는 물가와의 전쟁이 장기화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짚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