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재에서 40년간 잠들었던 인플레이션이 부활한 배경을 설명해 드렸어요. 기조적으로 낮은 수준을 유지했던 국제유가, 즉 에너지 가격이 상승하면서 에너지 사이드에서의 인플레이션 압력이 높아졌음을 설명해 드렸죠. 물론 이것만이 40년 만의 인플레이션 부활을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오늘은 다른 결정적 원인에 대해 살펴보도록 할게요.
시작은 2008년 금융위기라고요?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를 두고 ‘100년 만의 위기’라고들 했습니다. 1929년 대공황 이래 경제적으로 가장 충격적인 사태라는 거죠. 당시 금융 위기를 단순히 ‘리먼 브라더스’라는 거대 금융 기관 하나가 파산한 사건이라고 해석하면 곤란합니다.
금융 기관은 인체로 따지면 심장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온몸에 혈액이 순환될 수 있도록 계속해서 혈액을 만들어서 뿜어주죠. 그런데 금융 위기라 함은 아예 심장이 망가진 겁니다. 온몸 구석구석에 혈액을 공급해 줄 수 있는 동력이 사라지는 거죠. 피가 흐르지 않으면 그 신체 부위가 괴사하게 되고 심하게는 죽음에 이를 수도 있어요.
금융 위기 당시 금융 기관의 파산은 전 세계 금융 시장이라는 혈관에 피, 즉 돈이 흐르지 못하게 만들었고, 돈이 흐르지 못하니 실물 경제가 빠른 속도로 마비되기 시작했습니다. 실물 경제의 붕괴는 사람들의 소비 위축으로 이어지면서 수요의 부족과 함께 물가가 하락하는, 디플레이션 압력을 높였어요.
디플레이션이 왔으니 경기 부양책을 썼겠네요
글로벌 금융 위기 당시의 파고가 워낙에 컸기 때문에 당시 미국은 사상 초유의 양적완화에 돌입했어요. 버냉키(Bernanke)라는 세계적인 경제 불황 연구 권위자가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런 그가 100년 만의 위기 국면에서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위원회(연준)의 수장으로 앉아 있었다는 건데요, 버냉키는 딱 잘라 말했습니다. 이런 거대한 위기를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시장의 기대를 뛰어넘는 부양책을 쓰는 것’이라고요.
그 결과 앞서 말씀드린 양적완화, 그러니까 (기존에는 볼 수 없었던) 각종 창의적인 돈 풀기가 시행되었죠. 이뿐만이 아닙니다. 미국 행정부는 7000억 달러의 경기부양 자금을 별도로 조성해서 무너져가는 실물 경기를 받쳐주고자 노력했어요. 중국도 4조 위안이나 되는 부양책을 준비했어요. 전 세계가 돈을 풀고, 재정 지출을 늘리면서 인위적인 경기 부양을 통해 금융 위기의 충격에서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쓴 거죠.
그렇게 돈을 들이부으면 디플레이션으로 처박혔던 물가가 조금씩 회복되며 경기가 살아나는 모습을 보였는데요, 조금 괜찮나 싶어서 무리가 되는 부양책을 거두어들이면 어김없이 실물 경제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물가도 디플레 상황으로 되돌아가 버렸습니다. 마치 환자에게 약을 먹이면 잠시 나은 것 같다가, 차도가 보여서 약을 줄이면 금세 재발하는 것 같은 상황이었죠. 그만큼 금융 위기의 충격이 깊고 치명적이었던 거예요.
유럽 경제위기와 코로나까지 엎친 데 덮쳤었죠?
2010~2012년은 세계 경제에 심각한 문제 하나가 다시 한번 터져 나온 시기입니다. 바로 유럽에 재정 위기가 닥쳤던 것인데요. 재정 위기는 말 그대로 정부 재정이 파탄 나서 나타나는 위기입니다. 혹시 10여 년쯤 전에 유럽 망한다는 얘기, 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이 위험하다는 얘기를 들어보신 기억이 있나요? 이러한 재정 위기를 거치면서, 전 세계 국가들은 방만한 재정 정책이 심각한 부채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중앙은행의 돈 풀기는 만성이 되어서 이어지고 있었지만 재정 지출은 최대한 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이 강해진 것이죠.
그러던 상황에서 찾아온 것이 바로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입니다. 팬데믹은 보건 위기인 동시에 심각한 경제적 리스크입니다. 사람들의 경제 활동이 멈추어 서고, 그로 인해 소득이 사라지게 되죠. 소득이 사라져도 쌓아둔 저축이 있으면 괜찮은데, 당시는 오히려 빚이 많았다는 게 문제였어요.
부채가 많은데 경제 활동을 멈추게 되면 부채 문제로 인해 수많은 경제 주체가 도산하게 되겠죠. 그렇게 되면 이들에게 대출을 해준 은행들까지 무너지면서 금융 기관들의 위기, 즉 금융 위기 시즌 2를 만들어낼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전 세계는 일본이 디플레이션의 늪에서 30년 이상 회복되지 못하는 것을 지켜본 참이었습니다. 부채가 많은 상황에서 이걸 그냥 내버려두었다가는 전 세계가 일본처럼 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어요. 이에 전 세계 정부와 중앙은행, 특히 미국의 연준과 당시 트럼프 행정부는 상당히 강한 경기 부양을 결정했어요.
연준은 무제한으로, 필요한 만큼 돈을 공급하겠다는, 이른바 무제한 양적완화 정책을 발표했죠. 트럼프 행정부에서도 2조 달러가 넘는 부양책을 준비했고, 이후 9000억 달러를 추가로 지급하는 정책을 발표합니다. 여기서의 부양책이 과거와 달랐던 것은 미국인들 전원에게 직접 현금을 나누어주었다는 점이에요.
현금을 직접 받은 사람들은 바로 물건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로 인해 공장이 가동되지 않아 공급은 제한되어 있었어요. 공급은 부족한데 수요는 폭발하는 상황이 펼쳐지게 된 거죠. 네, 이 조합은 필연적으로 제품 가격의 상승, 즉 인플레이션을 부르게 됩니다.
물가가 올랐으니 경기 부양을 멈추면 되지 않았을까요?
이렇게 물가가 올라오는 것을 확인했으면, 물가 파수꾼이라는 별명을 가진 연준이니만큼 인플레이션에 대한 경계감을 강하게 가지면서 돈 풀기를 멈추는 게 자연스러운 수순이었겠죠. 그렇지만 금융 위기 이후 돈을 풀다 멈추면 바로 물가가 주저앉기를 반복하는, 워낙에 연약한 경제 체제를 경험해 보았기에 연준은 인플레이션이 강하게 올라오고 있었음에도 ‘지금의 물가 상승은 일시적’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더 강한 돈 풀기로 일관했습니다. 물가가 올라오는데 되려 돈을 더 풀어버리는 우를 범한 거예요.
물가가 큰 폭으로 상승하기 시작했고요, 여기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이 국제유가를 크게 끌어올리면서 이른바 인플레이션의 화룡점정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게 40년 만에 인플레이션이 부활한 것이죠.
이렇게 비유를 하면 좋을 듯합니다. 집을 샀는데 앞마당에 맨홀 뚜껑 크기 정도 되는 큰 구멍이 있는 겁니다. 마당에 구덩이가 있는 게 너무 싫어서 업자를 불러서 이 구멍을 메워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업자가 하루 이틀 작업을 해보더니 어려울 것 같다고 말하는 겁니다. 이유인즉슨 그 구멍이 너무나 깊게 파여있고, 계속해서 하단이 무너지면서 깊이가 깊어지고 있다는 거죠. 여기에 웬만한 흙을 퍼부어도 쌓이는 느낌이 전혀 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집주인은 이를 악물고 엄청난 흙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말하자면 옆 산을 깎아서 엄청난 토사를 준비해서 구덩이에 밀어 넣은 겁니다. 엄청나게 많은 흙을 부으니 제아무리 구덩이 밑이 많이 뚫려있어도 결국은 채워지기 마련이죠. 문제는 이번에는 또 흙을 너무 많이 부으니까, 그 구덩이를 모두 메우고 남은 흙이 산처럼 흙이 쌓였습니다. 이제 업자에게 다시 부탁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 산 좀 치워달라고 말이죠.
디플레이션이 강하다는 것은 구덩이의 깊이가 깊다는 겁니다. 당시 디플레이션은 구덩이가 깊어서 웬만한 돈 풀기(흙 퍼붓기)로 이 구덩이를 메우지 못한 거죠. 그래도 계속 흙을 퍼붓자 구덩이가 메워지긴 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엔 집 앞에 산이 쌓인 것이죠.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단행된 너무나 강한(?) 부양책의 부작용, 느껴지시나요? 40년 만에 인플레이션을 깨운 주범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음 에세이에서는 부활한 인플레이션을 제압하기 위한 전 세계 각층의 노력에 대해 다루어 보겠습니다.
💌 <MZ를 위한 투자 상식>은 매주 화요일 머니레터에 연재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