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인
지난해 12월 24일, 영화 <서울의 봄>이 천만 관객을 돌파했어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극장가가 침체돼 있던 와중에 등장한 천만 영화라 더욱 뜻깊은 소식이었죠.
1970년대 말 역사를 다룬 팩션임에도 불구하고, 2030 관객 비중이 60% 이상이었던 점도 눈에 띄었습니다. 그 덕에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대한 MZ세대의 관심도 덩달아 높아졌다고 해요.
그래서 어피티도 준비했어요. ‘그래도 살기 좋았다’라는 평과 ‘나라 망하기 직전이었다’라는 평이 극단적으로 공존하던 1970~1980년대, 우리나라의 경제는 과연 어땠을까요?
나라 경제가 너무 빨리 커서 문제야?
옛날 경제학자: 우리나라 경제 너무 빨리 크고 있어요! ‘과성장’을 멈춰야 합니다!
옛날 경제관료: 우리도 속도 조절하려고 노력 중이라고요!
the 독자: 네? 어떻게 경제 성장을 멈추라는 말씀을 하세요! 😠
옛날 사람: 라떼는~ 경제 규모가 너무 빨리 커지는 바람에 부작용도 심했어~
the 독자: 경제가 부작용이 생길 만큼 잘 될 수도 있나요?
경제 성장은 이럴 때 이뤄집니다
1970년대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 경제가 고도성장했다는 사실은 모두 알고 계실 거예요. 이른바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던 때였죠.
요즘 경제뉴스가 ‘마이너스 성장’, ‘수출 감소’, ‘경기 침체’, ‘막대한 가계부채’ 등 아쉬운 내용들로 채워지는 걸 생각하면, 그때는 참 좋았던 시절이었을 것만 같습니다.
옛날 사람: 꼭 그렇지만은 않다니까요? 😠
네, 고도성장이라고 좋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먼저 ‘경제 성장’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짚고 넘어갈게요. 경제성장은 아래와 같은 조건이 다 갖춰졌을 때 이뤄져요.
- 사람들이 물건을 많이 사고 싶어하면서 👉 수요 증가
- 그 물건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증가하면서 👉 생산성 증가, 공급 증가
- 물건을 만들어서 팔면 사람들이 마음껏 사가면서 👉 임금 상승, 적당한 인플레이션
보통 이 과정에서 생산성과 공급은 수요보다 느리게 증가합니다. 공급이 부족한 만큼 물건값은 올라가고, 물가가 계속 상승하며 적정 수준을 넘어서면 어마어마한 인플레이션이 닥쳐와요.
1970년대가 딱 그랬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물가가 올랐어요. 과성장에 따른 인플레이션으로 ‘이거 속도 조절 좀 하면서 가자’라는 이야기가 매일 나왔죠.
마이너스 성장률로 시작한 1980년대
1980년대는 마이너스 성장으로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코로나19 팬데믹 같은 전 세계적 비상 상황이 되어서야 나오는 GDP 마이너스 성장 이야기가, 아직 한창이던 고도성장기에 등장한 거예요.
영화 <서울의 봄>의 배경은 1979년 12월 12일입니다. 그렇게 정권이 바뀐 바로 다음 해인 1980년,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률은 -6.2%를 기록했어요.
the 독자: 갑자기 왜요?
옛날 사람: 1979년에 사건사고가 많았어. 대표적으로 국내에선 박정희 대통령 암살과 12·12 군사반란, 해외에선 제2차 오일쇼크, …
the 독자: 정세가 불안하면 경제에 리스크가 생긴다는 거죠?
옛날 사람: 하지만 그건 표면적인 이유일 뿐, 사실 그 전부터 좀 불안했지!
1977년과 1978년, 이미 우리나라의 수출 증가율은 크게 떨어지고 있었어요. 수출로 먹고사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수출이 어려워지면 경제가 어려워집니다.
게다가 박정희 정부가 추진하던 중화학공업 정책도 성과가 나지 않던 상황이었어요. 중화학공업에 무리하게 투자하면서 달러를 빌려왔는데, 그 달러 빚을 못 갚아서 나라 망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죠.
1980년의 마이너스 성장은, 정부가 중화학공업 밀어주기를 중단하고 수출경쟁력이 있었던 경공업에 지원하기 시작하면서 플러스로 돌아섭니다.
‘그래도 살기는 좋았어’의 정체
1980년대에 경제활동을 하신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래도 그땐 좋았어’라는 말이 종종 나오곤 합니다. 이분들이 기억하는 ‘그때’는 1980년대 중후반일 거에요.
1980년대는 초반과 중후반의 분위기가 너무 달라서, 같은 1980년대로 묶어내기가 어렵습니다.
- 1980년대 초: 물가상승률이 한 해 30%에 육박하기도 했습니다.
- 1980년대 중후반: 단군 역사상 대한민국 최대의 호황이 왔습니다. 이때가 바로 3저호황이에요. 환율·금리·유가가 모두 낮아서 수출에 큰 도움이 됐어요.
화려한 경제 성장, 그 뒤의 그림자
<서울의 봄>에 나왔던 군사 반란은 1987년 6월 막을 내립니다. 이전 군사정권 시절에는 대통령을 국민들이 직접 뽑지 못하고 선거인단이 뽑았는데, 6월항쟁을 통해 민주화가 이뤄지며 지금과 같은 직선제로 바뀌어요.
the 독자: 궁금한 게 있어요. 1987년은 한창 3저호황일 때 아닌가요? 경제가 잘 나가는데 사람들의 불만이 쌓였던 이유가 뭘까요?
옛날 사람: 그게 참 여러 이유가 있는데…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데는 여러 가지 배경이 있지만, 경제적인 문제도 중요했습니다. 3저호황 당시 연평균 근로 시간은 무려 3천 시간이었어요. 휴일 없이 매일 8시간 넘게 일하거나, 주 6일제로 하루 10시간 가까이 일해야 하는 강도입니다.
※ 2022년 기준 우리나라의 연평균 근로 시간은 1,829시간입니다. 여전히 OECD 평균인 1,646시간보다 길어요.
이렇게 오랜 시간 일하는데도 월급은 실질적으로 감소했습니다. 사무직과 생산직을 가리지 않고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찾아온 ‘좋았던 시절’
1987년 민주화 이후 최저임금이 도입되고 법정근로시간이 줄어드는 등,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발생했던 경제적 문제는 어느 정도 해소됩니다. 하지만 미처 해결하지 못한 구조적인 문제가 속으로 곪아, 1997년 외환위기가 찾아오게 되죠.
그래도 그 사이 10년간 우리나라 경제는 대체로 순탄하게 유지됩니다. 인기 TV 시리즈인 <응답하라 1988>, <응답하라 1994>, <응답하라 1997>에 등장하는 시절,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았던 시절’로 불러낼 수 있는 시절이 딱 그 사이 10년인 셈이에요.
📚 이 글을 쓰는 데 참고한 자료
- 유정호, <한국경제의 고속성장과 선진화(2022)>, 한국경제포럼
- 김정인, <꼬리에 꼬리를 무는 한국경제사(2023)>, 휴머니스트
그때 정말 먹고살 만했나요?
(feat. 신성호 기자님)
📌 ‘서울의 봄’은 1979년 10월에서 1980년 5월까지의 짧은 기간을 뜻해요. 1979년 12월 군사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신군부는 1987년 1월 벌어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폭로를 계기로 물러났습니다. 어피티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처음 취재한 신성호 기자님(신 기자)에게 몇 가지 의견을 여쭤볼 수 있었어요.
어피티: 영화 <서울의 봄>이 흥행하면서 한국사 되돌아보기가 유행 중인데, 12·12 군사반란으로 시작된 정권을 끝내게 된 계기가 기자님의 취재였으니 감회가 새로우실 것 같아요. 지금의 심정을 말씀해 주신다면요?
신 기자: 신문 기자 시절인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세상에 처음 알렸던 사람으로서 군부 독재정권을 끝내는 데 방아쇠(trigger) 역할을 했다는 자부심을 느낍니다. 이 사건은 이후 6월 항쟁으로 이어져 전두환 정권의 ‘6·29선언’을 끌어냈고, 민주화로 이어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