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왕좌에서 내려오다


글, 서영민

삼성이 잃어버린 세 개의 타이틀

“삼성이 세계 최초로 XXX D램을 개발했습니다”


너무 익숙한 표현이죠? 저는 메모리는 영원히 삼성이 세계 최초일 줄 알았어요. 하지만, 영원한 1등은 없다는 걸 알게 됐죠. 


상실 1 기술 타이틀

삼성이 ‘기술로 최고’라는 타이틀을 유지한 건 2019년이 마지막이에요. 그해 삼성은 10나노 수준 D램의 3세대 모델(1z)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으나, ‘최초’ 자리를 마이크론과 SK하이닉스에 넘기게 되죠. 4세대(1a)와 5세대(1b), 6세대(1c) 기술의 선도 기업 타이틀은 이제 삼성의 몫이 아니에요. 


상실 2 부가가치 타이틀

2023년에는 ‘가장 비싼 메모리’ 타이틀도 잃어버려요. 즉, 시장 지배력을 내준 거죠. 5세대 HBM 제품(HBM3E)은 SK하이닉스가 개발했는데요. HBM은 지난 연재에서 설명해 드렸던 것처럼, ‘압도적인 부가가치’를 가지고 있어요. 없어서 못 팔고, 부르는 게 값이죠. 영업이익 차원에서 보면 기존 D램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라, 2024년 3분기부터 SK하이닉스는 영업이익으로 삼성을 뛰어넘었어요. 삼성은 2025년 6월 기준, 아직 HBM 납품에 성공하지 못했어요.


상실 3 점유율 타이틀

그리고 2025년, 삼성은 최고 점유율 타이틀마저 뺏기게 돼요. 1분기에 SK하이닉스가 D램 시장 점유율에서 1위인 삼성을 누르고 왕좌에 올랐어요. 1993년, 삼성이 일본 기업들을 제치고 1등을 차지한 지 32년 만에 발생한 일이에요. 


기술과 시장(부가가치), 그리고 비즈니스(점유율) 리더십 타이틀까지. 삼성은 2025년, 이 세 타이틀 가운데 단 하나도 가지지 못한 회사가 됐어요. ‘무어의 법칙’을 몸소 증명하며 성장하던 회사였던 삼성의 과거를 생각하면, 정말 많이 변했죠.


물리적 한계 앞에서 멈춰 선 삼성

삼성이 어려움에 빠진 이유는 ‘물리적 한계’라는 벽 때문이에요. 칩워를 쓴 크리스 밀러가 KBS 다큐멘터리 <삼성, 잃어버린 10년>에 나와서 언급한 바 있죠. 


“최신 스마트폰의 두뇌인 AP칩에는 100억~200억 개에 달하는 트랜지스터가 들어있어요. 이 손톱만 한 크기의 AP칩에 100억 개가 넘는 트랜지스터가 들어가려면, 하나의 트랜지스터는 코로나바이러스의 약 절반 정도 크기여야 해요.”

-크리스 밀러, KBS 다큐멘터리 <삼성, 잃어버린 10년> 인터뷰 중-


‘미세화’와 관련해 메모리 회사는 신경 써야 할 것이 있어요. 시스템 칩을 만드는 회사는 트랜지스터만 생각하면 되는데, 메모리 칩을 만드는 삼성과 같은 회사는 ‘캐패시터’라는 혹이 하나 더 붙어있거든요. 데이터(정확히는 전하)를 저장하는 구조라고 이해하시면 되는데요. 칩을 더 작게 만들수록 이 캐패시터 만드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지는 거예요.


팹리스 회사로부터 의뢰받아 반도체를 생산하는 파운드리 공정은 3나노를 넘어서 2나노로 가고 있다고 하지만, D램은 아직도 10나노 대에서 6번째 공정(1c)을 진행 중이에요. 10나노 벽을 깨는 건 너무 어려워요. 9나노 정도까지는 가겠지만, 그 아래로 내려가긴 어렵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나올 만해요. 아래 그래프를 보면 알 수 있듯, D램 미세화는 파운드리에 비해 아주 느리죠.

출처: KBS, 삼성전자 시그널(2025)⟫


어떻게 SK하이닉스는 이런 어려운 공정을 해낼 수 있었을까요? 지금부터는 그 이유를 살펴보려고 해요.


불닭볶음면이라는 파괴적 혁신

먼저 사용할 개념은 ‘파괴적 혁신’이에요. ‘파괴적 혁신’은 경영학 이론의 대가 클레이튼 M. 크리스텐슨(1952~2020)의 이론이죠. 파괴적 혁신이라니 ‘모든 면에서 뛰어난 엄청난 기술’을 떠올리실 것 같지만, 이 ‘파괴적 혁신’은 그런 게 아닙니다. 오히려 좀 이상하거나, 수익성에 큰 도움 안 될 것 같은 상품과 관련이 있죠. 이를테면 ‘불닭볶음면’이죠. 


처음 불닭볶음면을 먹었을 때는 너무 맵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강한 거부감이 들었죠. 극도로 매운맛을 좋아하는 극소수 소비자를 위한 틈새상품이면 몰라도, 농심의 신라면처럼 이미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국가대표급 라면의 경쟁 상대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았어요.


그러나 불닭볶음면은 역사를 새로 썼습니다. 불닭볶음면을 만든 삼양식품은 라면시장에서 40년 넘게 장기 집권한 ‘신라면’의 농심을 제치고 영업이익으로 라면 업계 1위가 되었어요. 시가총액은 이미 8조 원(25년 5월 20일 기준)을 훌쩍 넘어, 농심 시총의 무려 세 배에 달해요.


정말 독특한 라면, 불닭볶음면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성장할 수 있었을까요?


그건, 시장 자체가 변했기 때문입니다. 신라면은 우리나라 라면계의 ‘왕’이었지만, 불닭볶음면은 지구촌 전체의 ‘라이징 스타’가 되었기 때문이죠. BTS가 세계를 휩쓴 이후 한국 문화와 식품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라면은 이제 세계에서 통하는 상품이 됐어요.


불닭볶음면을 소비하는 시장의 크기는 5000만에서 80억으로, 160배 커졌어요. 새롭게 펼쳐진 시장에서 불닭볶음면은 대체 불가능한 제품이 됐어요. 온라인에서 챌린지 열풍의 중심에 있는 ‘독특하고 참신한 뭔가’가 된 거예요. 기존 시장 참여자들이 보기에는 ‘이상한’ 제품이었지만, 그 제품이 더 큰 시장을 연 것이죠. 이게 파괴적 혁신의 정체이고, 삼양이 치고 나갈 수 있었던 배경입니다.

HBM이라는 파괴적 혁신

반도체 시장의 HBM은 불닭볶음면 같은 제품이 됐어요. 처음에는 시장이 너무 작아 보였죠. HBM은 그래픽칩 만드는 AMD나 엔비디아 같은 회사만 원했어요. 시장 수요의 80~90%는 모바일 D램을 사는 애플이나, PC-서버용 D램을 사는 인텔 등의 회사가 차지했는데, 이들은 HBM을 원하지 않았어요. HBM은 나은 점이 있긴 하지만 너무 비싼 이상한 칩이었어요.


그래서 삼성은 HBM 시장을 얕보았어요. ‘대역폭이 넓으면 뭐 해, 손님이 없는데! 내가 이 시장을 좀 아는데, 그거 만들어봐야 팔 데가 없어!’라고 단정 지었던 거예요. 게다가 이 HBM은 만들기가 좀 까다로운 편인데요. 다 만들어놓은 D램을 수직으로 쌓고, 구멍도 뚫어야 해요. 칩을 수직으로 빼곡히 쌓으니, 발열도 잘 견뎌야 하고요. 매출이 확실한 기존 D램 라인 하나를 통째로 HBM용으로 배정도 해야 하고… 즉, 수익성도 별로였습니다. 그래서 기존 시장에서 만족하는 거대기업 삼성은 ‘용감하게도’ HBM을 개발하지 않기로 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챗GPT가 나오면서 생성형AI가 모든 기술기업의 지향점이 됐어요. 엔비디아의 GPU가 필수품이 되고요. 그리고 이 GPU는 반드시 HBM과 함께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죠.  세상이 변했어요. 하루아침에 틈새 상품인 줄 알았던 HBM이 파괴적 혁신이 된 거예요. 


선도기업은 몰락할 수밖에 없다 

1등 기업은 파괴적 혁신을 외면하기 쉬워요. 한 4~5년 전, HBM이 주목받기 시작할 당시 삼성은 대략 매출 200조 원에 달하는 거대 회사였어요. HBM은 매출 1조 원도 기대하기도 어려운 사업이었죠. 전체 매출의 0.5%가 안 되는 수준이라 삼성 입장에서는 너무 작았어요. 


삼성과 달리 HBM은 SK하이닉스엔 달리 보였을 거예요. 당시 하이닉스 매출은 20조 안팎이었죠. 1조 원으로 HBM 매출을 잡으면, 전체 매출의 5% 정도예요. 하기에 따라서는 더 커질 수도 있고요. 베팅을 해볼 만한 거예요.


삼성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 파괴적 혁신은 기존 시장을 이끄는 거대 기업과는 어울리지 않아요. 그래서 크리스텐슨의 파괴적 혁신 이론은 ‘선도기업의 몰락’을 예고해요. 한때 혁신으로 시장을 지배했더라도 승리는 영원하지 않으며, 혁신 기업도 역사 속으로 저물 수 있어요. 아니, 저물게 돼요. 지금 삼성전자를 향한 비관이 시장을 뒤덮은 이유는 바로 여기 있습니다.


“가장 강한 것이 끝까지 정상의 자리를 지키라는 법은 없다. 누구든 몰락할 수 있고, 대개는 결국 그렇게 된다.”

– 짐 콜린스, 위대한 기업은 다 어디로 갔을까?


지금까지 삼성은 못 했지만, SK하이닉스는 파괴적 혁신이 가능했던 이유에 대해 알아봤어요.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에요. 업계에서도 D램 자체의 경쟁력이 떨어지는 건 파괴적 혁신으로는 설명이 어렵다며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거든요. 사람들이 ‘재무가 득세하면 기술기업은 위기를 겪는다’거나 ‘삼성 사람들 이제는 더 이상 도전하지 않는다’는 얘길 하잖아요? 아직 설명되지 못한 뭔가가 있는 거예요. 다음 시간에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 필진 소개: KBS에서 금융, 재정, 국제경제 기사를 주로 써요. 그러니까 전공은 ‘대한민국 경제’예요. 기삿거리를 찾던 어느날, 국가대표 삼성전자에서 ‘근본적 위기 신호’를 감지했어요. 이후 ‘칩’을 파고들었어요. 삼성전자를 주제로 크리스 밀러, 짐 켈러 같은 세계적 칩 명사를 등장시킨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큰 반향을 일으켰고, 여세를 몰아 《삼성전자 시그널(2025)》을 썼어요. 시대의 흐름을 읽어드립니다. ‘빠져들게 만드는 스토리텔링’을 추구합니다. 읽는 재미와 깊은 인사이트, 둘 다 담아서 여러분을 찾아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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