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출력은 무의미한 삼각형들의 나열에 불과했지만, 이미지를 렌더링하는 과정에서 GPU는 우연히 중요한 과학적 계산을 빠르게 실행했다. 학계에서는 지포스 카드를 대량 구매하여, 이를 서로 연결해 금융 모델링, 날씨 시뮬레이션, 고에너지 물리학, 의료 영상 처리 등 다양한 분야의 응용프로그램을 개발했다. 게임용 카드였던 지포스는 즉석에서 조립하는 과학 도구로 변모했다. ⟪생각하는 기계⟫, 스티븐 위트, 2025, RHK, p.218
과학자들은 저렴한 그래픽 카드가 쓰기에 따라서는 슈퍼컴퓨터보다도 연구에 더 적합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게임용 그래픽 카드 칩을 사서 게임을 하는 대신, 뒷문을 열고 과학 도구로 개조했죠. 젠슨은 여기에 미래가 있단 걸 직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에게 뒷문 대신 앞문을 달아주기로 했어요. 그게 바로 CUDA 예요.
이 CUDA를 통해 사람들은 천체물리학, 기후학, 의학, 물리학, 금융, 양자 컴퓨팅,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분야에서 더 효율적으로 GPU를 활용할 수 있게 되었어요.
젠슨은 이걸 제로빌리언 달러 시장 개척 (Pioneering Zero-Billion-Dollar Markets)라고 불러요. 존재하지 않거나 시장 규모가 0달러인 새로운 시장을 발굴하는 엔비디아의 핵심 전략이에요. 당장은 돈이 안 돼도 가능성을 보고 새로운 시장을 만드는 것이죠.
누가 봐도 크리스텐슨의 ‘파괴적 혁신’ 이론을 곱씹고 또 곱씹은 결과입니다. 인터뷰에서도 젠슨은 ‘큰 기업의 몰락’을 경고하는 크리스텐슨의 책을 수없이 반복해 읽었고, 또 생각했다고 말하죠. 생각은 쉽지만, 실천은 어려워요. 엔비디아는 그걸 해내서 AI 시장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칼을 손에 쥐었어요.
젠슨은 운이 좋았지만, 운만 좋았던 것은 아니었던 것이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그렇게, GPU는 게임 도구가 아닌 미래를 여는 도구가 되었어요. GPGPU의 시대, 일생일대의 기회(O.I.A.L.O.)라는 젠슨의 직감이 현실이 되었죠.
엔비디아와 삼성은 얼마나 다른가
엔비디아 주가는 2023년 실적을 발표한 2024년 초부터 급등하기 시작했어요. 2023년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약 680%가 증가해 300억 달러를 넘을 정도였죠. 이건 엔비디아가 창업 후 30년간 거둔 영업이익을 다 합친 것보다 많았어요!
그러나 삼성과 비교하면 소소합니다. 삼성은 이미 2013년에 350억 달러에 육박하는 영업이익을 거뒀어요. 그런데 왜 삼성의 주가는 그대로일까요? 사람들이 진가를 몰라주는 걸까요? 그건 주식 시장의 특징에 있어요. 단순한 실적보다 ‘미래’를 평가하게 마련이고, 삼성전자는 바로 이 평가에서 늘 뒤처졌기 때문이죠.
우선, 삼성에는 비전가가 없어요. 최적화의 ‘스티브 잡스’이건, 목표 제시형의 ‘일론 머스크’이건, 현실 속에서 미래의 씨앗을 발견하는 ‘젠슨 황’이건, 혁신에는 비전이 필요한데 삼성에는 그런 비전이 없었죠. 그러니 당장에 ‘돈이 안 될’ 투자는 할 수 없는 회사가 됐어요.
회사가 커 갈수록 조직은 비대해지고, 관료화돼요. 그런데 엔비디아는 지금도 COO나 CTO, CMO 같은 직책이 없어요. 명확한 이인자도, 비서실장도 없어요. 대신 30명 이상이 젠슨에게 직접 보고하고, 대부분 유동적인 역할을 맡아요. 젠슨은 전 직원으로부터 메일을 받고, 무작위로 몇 건을 읽고 업무를 처리하고 있어요. (이번 글은 ‘생각하는 기계’에 많이 빚지고 있네요. 일독을 권합니다.)
과감한 M&A도 필요해요. 엔비디아는 끝없이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을 인수하고 있어요. 기업 안에서 싹트기 어려운 혁신 역량은 외부에서 비싼 대가를 치러서라도 확보해야 해요. 삼성이 하지 않는 일이죠.
또한, 생태계 속에서 꿈꿔야 해요. 얼마 전 타이완에서 열렸던 <컴퓨텍스 2025> 기조연설을 보셨나요? 젠슨 황이 그리는 미래를 엿보려면 꼭 보시는 것을 추천해 드려요.
젠슨은 ‘타이완과 함께 AI 세상의 미래를 열겠다’고 선언했어요. 타이완에 거대한 엔비디아 지사를 짓겠다고도 말했죠. 자신이 타이완 출신이어서도, 타이완에 TSMC가 있기 때문도 아니에요. 타이완에 AI 컴퓨팅 세계를 혁신할 수많은 기업과 생태계가 있어서예요.
이 생태계는 TSMC로 인해 태어났지만, 각자의 영역에서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죠. 폭스콘은 단순히 애플의 하청기업이 아니에요. 로봇과 디지털 트윈의 힘을 바탕으로 정밀 AI 제조 공장으로 나아갔죠. 세계 최대의 패키징 기업 ASE도 있고, 퀄컴보다 모바일AP 점유율이 높은 미디어텍도 대만에 있어요. 셀 수 없이 많은 기업이 각자의 힘으로 우뚝 서 있죠.
젠슨은 이날 삼성전자는 물론 SK하이닉스조차 언급하지 않았어요. 만약 젠슨이 그리는 미래에 한국 기업이 없어도 되는 거라면… 생각만 해도 선뜩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