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경험이 꼭 쓸모 있을 필요는 없어요 슬픔을 슬픔인 채로 두는 문학처럼

글, 리댁션 책방지기 한수련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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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를 보다 보면 실패 이야기로 시작하는 릴스를 만나요. 사업이 망했던 일, 취업에 실패했던 일, 통장 잔고가 바닥났던 일로 우리의 눈길을 붙잡죠. 수백만 조회 수를 기록한 릴스와 멋진 사진이 실린 인터뷰 기사에서, 제가 자주 만난 실패 이야기는 “그 경험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어요”로 끝났어요. 응원할 만한 이야기인데, 읽고 나면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되는 날도 있었어요.

 

‘나는 그 일에서 무엇을 배웠지? 그렇게 힘들었는데, 달라진 게 있나?’

 

다른 사람은 실패조차 야무지게 활용하는 것 같았어요. 그 사이에서, 아무 데도 쓰이지 못한 제 실패를 떠올리면 한 번 더 실패한 기분이 들었죠. 그때부터 이 질문을 품게 됐어요. 모든 경험에서 꼭 쓸모를 찾아야 할까요? 어떤 일은 그냥 내 삶의 일부로 남겨두면 안 될까요?

 

저는 연남동에서 책과 대화를 매개로 사람들이 만나는 공간 리댁션(Readaction)을 운영하고 있어요. 11년 동안 브랜드의 언어와 이야기를 만드는 일을 해왔고, 그 사이 이직도 하고 프리랜서로도 일했어요. 지금은 북클럽과 스토리텔링 대화를 통해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을 돌아보는 시간을 함께하고 있죠.

 

그런 제가 경험의 쓸모를 묻는 게 모순처럼 들릴 수도 있겠어요. 제가 구분하고 싶은 건 ‘의미’와 ‘쓸모’예요. 지나간 일을 돌아보며 당시에는 몰랐던 마음을 이해할 수는 있어요. 그렇다고 그 일이 반드시 나를 성장시키거나 다음 단계로 데려갈 재료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 잘되지 않은 경험마저 잘 써야 한다는 부담

실패하고, 무언가를 배우고, 이전보다 나은 사람이 되는 이야기는 언제 봐도 참 교훈적이죠. 물론 그런 경험도 있어요. 시간이 흐른 뒤 상처가 자양분이 되고, 시행착오가 다음 성공의 발판이 되기도 하니까요. 다만 그것이 삶을 설명하는 당연한 순서가 되면, 다른 질문이 생겨요.

 

“성장하지 못했다면 그 실패는 무의미한 걸까요?”

 

열과 성을 다해 사랑했지만 이별했다면, 그때의 슬픔은 슬픔인 채로 두어도 괜찮을 것 같아요. 하는 일에 비해 월급이 적어 화가 나서 퇴사했다면, 그 선택에 거창한 이유가 있어야 할까요? 10년을 함께한 친구와 특별한 사건 없이 멀어졌다면, 그 우정이 나를 성장시키는 재료가 될 필요도 없고요.

 

실제로 우리의 삶은 매끈하지 않잖아요. 울퉁불퉁, 일렁일렁. 이런 표현이 어울리지 않을까요? 어떤 일은 반전 없이 밋밋하게 끝나요. 허무함이 남기도 하고, 끝내 극복하지 못하기도 하죠. 그런 시간을 어떻게 바라보면 좋을지 생각하다 보면, 저는 문학으로 돌아가요.

 

📖 우리의 삶을 문학처럼 읽는다면

리댁션 북클럽에서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어요.

 

“문학은 슬픔을 슬픔인 채로 편안하게 인정해주는 드문 장르인 것 같아요.”

 

10대부터 제가 문학을 곁에 두고 살아온 이유를 설명해주는 말이었어요. 문학 속 인물들은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기도 하고, 중요한 순간에 엎어지기도 해요. 책장을 덮고도 그 사람의 삶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죠. 그런데도 우리는 그 이야기를 오래 들여다봐요. 제게도 그렇게 오래 남은 책들이 있어요. 책장을 덮고 나서도 인물의 선택을 생각하거나, 한 문장 곁에 머물렀던 책들이요. 지나온 시간을 바라보는 마음도 이 책들 사이에 있으니 살며시 전해볼게요.

📚 《크눌프》 – 헤르만 헤세

《크눌프》는 제가 20대에 만난 책이에요. 제가 거쳐 온 경로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상처받던 때였죠. 안정적인 직업과 가정에 정착하지 않고 떠도는 크눌프를 읽으며, 제 삶도 이해받을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작품 해설에 실린 헤세의 말에는 이런 구절이 있어요.

 

“(…) 연약한 사람들, 쓸모없는 사람들까지도 사랑하고 그들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일세.” 142p

 

크눌프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삶에도 진지한 관심을 기울여요. 다른 삶을 배척하거나 경멸하지 않죠. 저는 그 시선을 저 자신에게도 건네고 싶었어요. 남들과 다른 경로를 지나왔다는 이유로 제 삶을 평가하지 않으면서요.

 

📚《노베첸토》 – 알레산드로 바리코

배에서 태어나 평생 한 번도 땅을 밟지 않은 피아니스트 노베첸토는 건반에 관해 이렇게 말해요.

 

“건반은 88개이고 당신은 무한해. 난 이런 게 좋아.” 76p

 

건반에는 시작과 끝이 있지만,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음악은 무한할 수 있다는 말이에요. 이 문장을 삶에 겹쳐서 읽어보았어요. 살아가는 세계에 경계가 있어도, 그 안에서 느끼고 사랑하고 만들어내는 것까지 작아지는 건 아닐 거예요. 더 멀리 나아갔는지, 더 많은 것을 이뤘는지만으로 한 사람의 삶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 안희연

“슬픔을 세는 단위를 그루라고 부르기로 한다” 133p

 

이 시집에서는 슬픔을 이렇게 헤아려요. 그때부터 슬픔이 한 그루씩 바라볼 수 있는 나무처럼 느껴졌어요. 눈앞에 많은 나무가 있으니, 헤아리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하겠구나 싶었죠.

 

시인은 작가의 말에서 울지 않았는데도 언덕을 내려왔을 때 충분히 운 것 같은 느낌을 이야기해요. 이 시집이 독자에게도 그런 언덕이 되어주기를 바라면서요. 책을 읽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아도, 마음이 머물다 내려올 자리는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 어떤 경험은 그냥 내 삶의 일부여도 돼요

3권의 책을 읽으며 경험에서 배움을 찾아내는 것 외에도 그 시간을 대하는 방법이 있다는 걸 생각했어요. 판단하기 전에 바라보고, 이해되지 않는 마음 곁에 머무는 일이요.

 

“그래서 무엇을 배웠지?”라는 질문에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이렇게 물어봐도 좋겠어요.

 

“나는 그 시간을 어떻게 지나왔을까?”

 

그 질문에도 당장 답할 수 없다면 잠시 두어도 되고요. 어떤 경험은 무엇을 배웠는지 설명하지 못한 채 내 삶에 남아 있어도 괜찮을 거예요. 사랑했던 마음도, 견뎌보려 애썼던 날들도 그 시간 안에 있으니까요.

 

저도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렇게 읽고 싶어요. 계속, 문학을 읽듯이. 아직 이해하지 못한 한 시절을 서둘러 교훈으로 바꾸지 않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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