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들이 뭔데 날 평가해? 신용평가사의 역사

경제 생활을 시작하면 가장 먼저 관심이 가는 것 중 하나가 ‘신용’입니다. 대출을 받을 때 꼭 알아야 하는 개념이거든요. 개인과 마찬가지로 기업, 국가도 신용도를 평가받습니다. 

지난해 8월, 국제 신용평가사 ‘피치’는 미국의 국가신용등급을 ‘AAA’에서 ‘AA+’로 강등했습니다.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은 물론 바이든 대통령까지 강하게 반발했죠. 미국 정부는 놀림을 받았어요. IT기업 MS와 제약사인 존슨&존슨이 미국 정부보다 신용등급이 높다면서요. 

어피티: 아니, 미국의 신용등급을요? 뭔가 큰일이 난 것 같은 느낌이에요.

옛날사람: 라떼는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일인데 말이죠. 허허허.

하지만 11월, 다른 국제 신용평가사인 ‘무디스’마저도 미국의 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바꾸고야 말았습니다. S&P는 이미 2011년에 낮춘 신용등급을 다시 올린 적이 없고요.

미국 입장에서는 이런 생각이 들 만도 할 겁니다. ‘니들이 뭔데 날 평가해?’


🎬 Scene #1.

어피티: 신용평가사라는 회사들은 대체 뭔데 나라들을 평가하나요?

옛날 사람: 하하, 이것 참. 옛날얘기를 해드려야겠군요. 라떼는 말입니다, 한국엔 신용평가사가 있지도 않았어요.

어피티: 네? 그럼 한국엔 신용평가사가 언제 생겼는데요?

옛날 사람: 1980년대요. 하지만 무디스같이 유명한 국제 신용평가사는 1903년부터 이미 유명했지요… 

어피티: 무디스면… IMF 때 ‘저승사자’라고 욕 엄청나게 먹은 회사네요?

옛날 사람: 무디스만 욕먹은 건 아니죠.

IMF 외환위기 직전, 세계 3대 신용평가사인 무디스(Moody’s)와 피치(Fitch), S&P(Standard&Poor’s)는 한 달 동안 우리나라 신용등급을 최대 12단계까지 강등했습니다. 그것도 한 번에 내린 게 아니라, 연쇄적으로 내렸어요. 

자고 일어나면 한 단계 더 내려가 있고, 이틀 뒤에 보면 또 내려가 있고, 일주일 뒤에는 새로운 위험이 발견됐다며 더 내리는 식으로 최대 열두 단계를 연쇄적으로 내려버린 거죠. 이 방식이 신용등급을 한 번에 크게 내리는 것보다 불안감을 더 자극합니다. 대체 어디까지 내려갈지 모르는 상황이니까요. 

당시 국제신용평가사들을 ‘저승사자’로 불렀던 이유입니다. 그냥 넘길 수도 있었던 위기에 확실한 치명상을 입혔다는 의견도 있어요. 이쯤 되니 더 궁금해집니다. 세계 3대 신용평가사가 뭐길래 국가를 평가하는 걸까요?

라떼는 무디스가
출판사였다네

가장 오래됐고, 많은 국가와 금융기관을 평가하며, 전 세계 언론에서 자주 인용되면서 회사들이 가장 많이 참고하는 국제 신용평가회사 세 곳을 ‘세계 3대 신용평가사’라고 합니다. 무디스와 피치와 S&P 세 곳이에요. 이 중 무디스의 이야기가 제일 유명합니다. 

무디스는 처음에 미국의 출판사였습니다. 소설이나 동화를 출판하는 곳은 아니었고, 각종 시장 통계를 모아서 책을 냈습니다. 책의 이름은 <Moody’s Manual of Industrial and Miscellaneous Securities>. 정부의 공공기관과 각종 산업의 통계, 회사와 은행들의 주식과 채권에 대한 잡다한 통계를 모아 낸 책이었죠. 여기서는 간단하게 ‘무디스 매뉴얼’이라고 할게요. 

지금으로 치면, 무디스 매뉴얼은 국책연구원인 한국개발연구원이나 국토연구원의 경제동향브리프 또는 금융감독원의 전자공시시스템, 각 회사 홈페이지의 IR 메뉴, 매년 나오는 서적 <트렌드 2024>과 비슷한 상품이었죠. 당시에 이 무디스 매뉴얼이 완전히 대박을 터뜨립니다. 1903년, 그러니까 책이 출간되기 시작한 지 3년 만에 전국적으로 인정받게 돼요.

최초의 유선전화가 발명된 지도 30년이 채 지나지 않았던 시절, 그리고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여행가는 게 한 사람 인생에서 일대의 도전이기도 했던 시절. 뉴욕에 있는 은행의 경영 상태라든가 피츠버그 철강 공장의 연간 판매량 같은 걸 일반인은 알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디스 매뉴얼이 나오면서, 일반인이 미국의 시장이 돌아가는 판을 대충 파악할 수 있게 된 거예요. 전문 투자자나 기업인에게도 좋은 참고 자료였지만 일반인에게도 주식과 채권 등 금융상품에 익숙해질 수 있는 길을 열어줬습니다. 특히 해외 투자자에게 더없이 필요했던 자료였어요.


🎬 Scene #2.

어피티: 그렇게 오늘날의 세계 3대 신용평가사가 된 건가요?

옛날 사람: 그런 건 아닙니다. 혹시 세계 경제 대공황이 언젠지 아세요?

어피티: 1929년에서 1939년까지 10년 정도요.

옛날 사람: 그때 거의 모든 회사가 줄줄이 부도가 나고 파산을 했는데… 무디스가 괜찮다고 평가했던 회사들은 대부분 살아남았거든요. 다른 주식들이 휴지조각이 될 때 무디스가 찍은 회사들의 주식은 투자자들의 자산을 지켜낼 수 있었죠.

어피티: 우와… 

옛날 사람: 무디스가 지금의 무디스가 된 이유죠.

피치와 S&P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피치는 회사와 회사의 보안에 대한 통계 보고서를 제공하는 출판사로 시작했습니다. S&P는 현재까지도 전 세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출판사를 소유하고 있어요. 대학원에 관심을 가졌던 분이라면 모두가 알 만한 출판사, 맥그로힐(Mcgraw-Hill)이죠. 미국의 대학 교재를 거의 독점하고 있는 출판사예요.

신용평가사가
막강해진 이유


굳이 세계 3대 신용평가사의 순위를 매기라면 S&P가 1위, 무디스가 2위, 피치가 3위 정도 됩니다. 전 세계 모든 고급 학문 교재를 출판하는 맥그로힐이 책 내에서 S&P 지수를 자주 인용하면서 영향력이 더 커지기도 했어요.


🎬 Scene #3.

어피티: 스토리만 보면 무디스가 1위일 것 같은데요.

옛날 사람: 무디스가 좀 극적이죠? S&P는 원래 푸어(Poor)라는 사람이 세운 회사인데요. 무디스보다 좀 더 체계적인 단일업종 기업분석으로 시작했다가, 1941년에 Standard라는 통계정보기업과 합병하면서 지금의 S&P가 된 거라 아무래도 창업 스토리에 드라마틱한 맛은 좀 떨어져요.

어피티: 여하튼, 그래서 다들 투자 정보를 필요로 하면서 신용평가사들이 지금처럼 커진 건가요? 신용평가사가 신용등급 매길 때마다 신문 1면에도 나고, 지상파 뉴스 앞쪽에 뜨잖아요.

옛날 사람: 그건 또 다른 이유가 있죠.

사실상 3대 신용평가사의 평가가 웬만한 나라를 흥하게 할 수도, 망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IMF 시절의 한국이었죠. 

그런데 신용평가사들이 대체 어쩌다 이렇게까지 힘이 세진 걸까요? 

정답은 ‘미국정부 때문’입니다.

1929년에서 1939년 사이, 전 세계가 대공황을 겪은 뒤, 미국 정부는 다시는 대공황 같은 사태를 맞이하지 않도록 대책을 세웁니다. 당시에 수많은 기업이 망하는 와중에도 신용평가사에서 ‘투자 적격’이라고 했던 회사들이 많이 살아남은 걸 보면서, 신용평가사의 평가에 투자 결정을 의지하기로 한 거예요. 

그렇게 1930년대부터 지금까지 미국은 자국 은행이 채권을 사려고 할 때, 신용평가사가 ‘투자 적격’ 등급으로 평가한 채권만 살 수 있게 했습니다. 또 기업이라면 반드시 신용평가사에서 신용등급을 평가받도록 하는 등 규제를 강화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1973~1975년 사이 신용평가사의 위상은 지금처럼 강해지게 되죠.


🎬 Scene #4.

어피티: 신용등급 평가를 의무화하는 건 좀… 신용평가사를 지나치게 신뢰하는 거 아닌가요?

미국 정부: 맞아요. 신용평가사도 틀릴 수 있죠. 그래서 사건·사고도 많았고요. 그런데 신용평가사 아니면 어떻게 기업 안정성을 점검하겠어요? 대안이 나올 때까진 이대로 가는 거죠.

미국에서는
미국 법을 따르라

무역이 활발해지고 금융자본이 국경을 넘어 다니면서 경제는 세계화 시대에 접어듭니다. 전 세계 최대의 소비자인 미국과 중국, 그중에서도 미국의 힘은 막강하죠. 미국에 물건을 팔거나 투자를 받으려면 그 나라 법을 따라야 합니다. 미국 법을 따르려면 다른 나라들도 미국 신용평가사에서 신용등급을 평가받아야 하고요. 

세계 3대 신용평가사는 그렇게 국제적으로 영향력을 갖게 됐답니다. 어쨌든 기업과 국가에 투자하려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정보라는 사실이 그 영향력을 뒷받침해주죠. 

자, 이제 이 뉴스가 잘 이해될 거예요. 앞서 읽은 내용을 떠올리면 차근차근 살펴 보세요!


📚 <라떼극장>에 참고한 자료

  • Timothy J. Sinclair (2005). The New Masters of Capital: American Bond Rating Agencies and the Politics of Creditworthiness, Cornell University Press.
  • White, Lawrence J. (Spring 2010). “The Credit Rating Agencies”. Journal of Economic Perspectives. 24 (2): 211–226.

공유하기

관련 글

화면 캡처 2024-11-03 080956
언제부터 김치를 사 먹었을까?
바야흐로 김장철이 다가오고 있어요. 김장철이란 24절기에서 입동(立冬) 전후를 뜻해요. 대체로 11월 7~8일 경이 겨울이 시작된다는...
olympic-games-6314253_1280
올림픽 개최는 남는 장사일까?
2032년에 개최될 제35회 하계 올림픽 유치를 두고 국내 도시 간 경쟁이 있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올림픽 개최 도시를 한...
8466_2225350_1718092789689973078
이불 팔던 회사가 한국 재계 서열 2위 된 썰.zip
최근 들어 SK그룹이 뉴스에 자주 등장합니다. 우선 SK하이닉스가 차세대 고대역폭 메모리(HBM)를 개발해 엔비디아에 독점 공급한다는...
woman inside laboratory
간호사는 왜 독일로 갔을까?
최근 몇 년간, 오랫동안 유지해왔던 우리나라 의료계 지형에 변동이 일고 있어요. 필수의료 공백과 지방의료 붕괴가 핵심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경제 공부, 선택 아닌 필수

막막한 경제 공부, 머니레터로 시작하세요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

뉴스레터 발송을 위한 최소한의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이용합니다. 수집된 정보는 발송 외 다른 목적으로 이용되지 않으며, 서비스가 종료되거나 구독을 해지할 경우 즉시 파기됩니다.

광고성 정보 수신

제휴 콘텐츠, 프로모션, 이벤트 정보 등의 광고성 정보를 수신합니다.

잘 살기 위한 잘 쓰는 법

매주 수요일 잘쓸레터에서 만나요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

뉴스레터 발송을 위한 최소한의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이용합니다. 수집된 정보는 발송 외 다른 목적으로 이용되지 않으며, 서비스가 종료되거나 구독을 해지할 경우 즉시 파기됩니다.

광고성 정보 수신

제휴 콘텐츠, 프로모션, 이벤트 정보 등의 광고성 정보를 수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