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오늘 내용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의 의미를 짚어 볼게요.
추가경정예산(추경)
예산이 정하여진 뒤에 생긴 사유로 말미암아
이미 정한 예산에 변경을 가하여 이루어지는 예산
추경은 쉽게 말해 ‘추가 예산’이라고 할 수 있어요. 최근 새로운 정부 들어 첫 번째 추경이 편성됐어요. 내수 경기가 심각하게 가라앉은 상황에서 주로 소상공인과 자영업자, 그리고 건설경기를 지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죠. 우리 경제에 꼭 필요한 긴급조치이지만 국채를 발행하는 등 ‘빚’을 내서 예산을 마련해야 하기에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어요. 여러 이야기들로 혼란스러울 때, 우리는 언제나 역사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어요.
1963년, 정부 예산의 30%를 해외 원조와 차관(대출)으로 채우던 시절, “빚이 아니라 투자라고 생각하고 돈을 달라!”고 외치던 부처가 있었어요. 나라에 전화선 설치할 돈이 없어 추경안에 공채 발행을 요구하던 ‘체신부’예요. 과거 체신부가 추경을 어떻게 이용했는지 살펴보면 추경을 통한 정부 재정 투입의 의미와 역할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잠시 과거로 시간을 돌려볼게요
19세기, 우리나라는 의외로 세계적인 첨단 문물이 가장 빠르게 들어오는 곳이었어요. 우리나라에 전기로 불을 켜는 백열등이 처음 들어온 게 1887년인데요, 에디슨이 백열등을 발명한 지 고작 8~10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에요. 대한제국은 차츰 전깃불을 보급해 나가기 시작했는데 초반 몇 년 동안은 그렇게 집집마다 백열전구를 많이 깼다고 해요. 사람들이 아직 전기와 불을 구분하지 못했던지라 전구로 담뱃대에 불을 붙이려고 그랬다네요. 영 불편하다며 불만이 많았대요.
물자가 풍부하던 시절이 아니어서 백열등은 오래 써야 하는 소중한 공산품이었어요. 그래서 대한제국은 관련 지식을 보급하려고 애를 썼죠. 새로 들어오는 신문물은 사람들에게 낯설고 불편하기까지 한 존재였으니까요. 일제강점기를 지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당시로서는 필수적인 인프라 겸 최첨단 서비스였던 우편·전신·전화·우편금융 업무를 담당할 중앙부처로 ‘체신부(遞信部)’가 출범한 배경이에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나라 역사에서 ‘체신부’라는 이름은 부처의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하고 명예로운 졸업을 했다고 볼 수 있겠어요. 그런 체신부도 처음엔 예산 확보가 최대 난관이었어요.
전화선 깔아야 하는데 예산이 부족했어요
다른 부처와 마찬가지로 체신부 역시 당장 깔아야 할 인프라가 많았어요. 1960년대에는 전화선 증설이 큰 문제였어요. 1960년 그해, 우리나라의 전화보급률은 고작 0.3%였거든요. 1,000가구가 있으면 단 3가구만 전화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죠. 동네에 전화기를 가진 집이 한 곳 있을까 말까 한 시절이었습니다. 전화기 자체가 비싸기도 했지만, 전화기를 산다고 해도 대도시가 아니고서야 전화선이 연결되는 곳도 드물었어요. 전화기 구매는 개인 몫이라고 해도 전화선은 국가가 깔아줘야 하는 인프라예요.
체신부: 전화보급률을 높이라는데 말이야. 전화선이 안 깔렸는데 누가 전화기를 사냐! 왜 예산 안 주는데!
어피티: 전화선 설치에 돈 많이 드나요?
체신부: 말이라고! 😡
맨땅에 전화선을 증설하려면 막대한 인력과 자재가 필요합니다. 기술적으로도 토목뿐 아니라 전기전자기술이 필요하니 당시 개발도상국이던 우리나라에는 나름 큰 도전이었어요. 도로나 마을을 파헤쳐서 케이블 전용 관로, 배선함 등을 설치하고 구리선을 매설하는 대공사였죠. 선만 깐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자동 전화보다 수동 전화가 더 많아서 전화 연결 시스템인 교환 설비가 전화국마다 요구됐어요. 물론, 비싼 수입 기계 기반이었죠.
체신부로서는 당연히 예산이 필요한 상황이었어요. 하지만 예산을 책정하고 분배하는 재무부는 당시 우정이나 통신보다는 중화학공업과 수출산업 등에 더 힘을 쏟는 국정 기조에 충실해, 예산을 많이 주지 않았어요. 추경을 통해 예산을 확보할 때도 어려움이 있었죠. 국가 재정 상황이 힘들었거든요. 1963년, 체신부는 채권 발행을 통해 추가경정예산으로 쓸 돈을 마련하고 싶어했지만 처음엔 거절당했어요. 건전재정을 위한다면 국가채무, 즉 빚을 더 늘려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힘이 셌거든요.
당시 신문기사를 통해 체신부의 입장을 살펴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