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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미제보다 잘나간 ‘무궁화 스타킹’을 아시나요? by.남영비비안

a person wearing a skirt and sitting on a bed

글, 정인


자동차나 명품 정도를 제외하고는 굳이 ‘외제’를 찾아다니지 않게 된 요즘이에요. 우리 일상에서 만나는 소비재 같은 경우엔 오히려 제품 라벨에 ‘made in Korea’가 적혀 있으면 품질이 좋을 거란 기대를 하게 되죠. 하지만 시계를 조금만 과거로 돌려보면, 지금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2000년대 초반, 노트에 필기할 때 가장 럭셔리한 펜은 일제 ‘사쿠라 젤리롤’이나 ‘하이테크’였어요. 조금 더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워크맨’이나 ‘코끼리밥솥’을 각 제품군에서 최고로 쳤던 시절이 나옵니다. 윗 세대로 갈수록 전반적으로 국산보다 외제를 더 높이 쳐주는 경향이 있어요. 한창 어렵던 시절에는 정말로 우리나라의 기술력이 모자랐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그보다 한참 전에, 1인당 국민소득(GDP)이 100달러 전후에서 오가던 1958년에 이미 외제보다 품질이 좋았던 소비재가 있었으니,  바로 나일론 스타킹이에요!

미제보다 잘나가는 ‘무궁화 스타킹’


스타킹은 처음에 서양에서 입던 바지 종류, ‘hose’의 일부였어요. 그런데 이 hose는 지금 우리가 흔히 입는 바지와 달리, 양쪽 다리가 분리돼 있어서 끈이나 단추로 고정해야 했어요. 


그러다가 15~16세기 즈음 hose의 다리 부분을 별도로 ‘스타킹’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독자적인 의류가 됐다고 해요. 바지 겸 속옷으로서 스타킹의 치명적으로 불편한 점이 하나 있다면, 바로 흘러내린다는 거였죠.


옛날 사람: 신고 있으면 발목에 주름져요. 두꺼워서 더워요. 무릎 부분이 튀어나와요. 너무 흘러내려서 벨트와 멜빵이 필요해요.

듀퐁(회사): 얇고, 질기고, 탄력적인 화학섬유라는 것을 개발한다!


1930년대, 미국의 듀퐁사가 나일론을 개발합니다. ‘거미줄보다 가늘고 강철보다 강하다’라는 광고 카피는 석유에서 뽑아낸 화학섬유 나일론을 정말로 잘 설명했어요. 


당시 나일론 스타킹 가격은 한 켤레에 1.15달러에서 1.35달러 사이로, 그때까지 스타킹 중 최고급이던 실크 스타킹보다 두 배 이상 비쌌어요. 그러나 내구성이나 착용감이 그보다 몇 배는 좋았기 때문에 비싼 가격에도 첫해 6천400만 켤레가 팔려나갔고, 듀퐁사는 돈방석에 앉았습니다.


불티나게 팔리던 나일론 스타킹 생산에 제동이 걸린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부터였어요. 나일론이 텐트, 모기장과 같은 군수용품 제작에 쓰이면서 스타킹 생산은 잠시 멈췄습니다. 


보통 어떤 제품의 공급이 뚝 끊기면 소비자들은 그사이 어떻게든 대체재를 찾아내고, 제아무리 인기 있었던 상품이라도 시장점유율을 빼앗기기 마련이에요. 하지만 나일론 스타킹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1945년에 전쟁이 끝나자마자 다들 나일론 스타킹을 사러 오픈런을 뛰었죠. 🏃


그로부터 13년 후, 1958년 어느날, 우리나라에서도 나일론 스타킹이 생산되기 시작합니다. 바로 ‘남영비비안’이라는 회사가 기술 제휴를 통해 만들기 시작한 ‘무궁화 스타킹’이에요. 미국에서 생산되던 것과 마찬가지로 다리 뒤에 세로로 까만 봉제선이 있는 타입이었는데, 4년 후인 1962년에는 무봉제 스타킹도 생산하기 시작합니다.


1976년에 상장한 스타킹회사


놀라운 건, 우리나라에서 나일론 스타킹을 생산하기 시작한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 이미 우리나라 스타킹의 퀄리티가 외제보다 좋았다는 거예요. 1962년 기사를 보면 당시 우리나라 소비자들이 국산 스타킹을 외제보다 선호한다고 기록하고 있어요. 올이 덜 나가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만든 스타킹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우리나라가 어려울 때 경제에 힘이 된 수출 효자 품목이었습니다.


이 스토리의 주인공, ‘남영비비안’은 1957년에 설립, 1976년에 상장한 회사입니다. 보따리 무역상이던 남상수 남영산업 사장이 1957년 서울 명동에 ‘남영염직’을 세우며 시작됐어요. 1961년에는 영등포로 이사해 팬티스타킹을 만들기 시작했고, 1964년에는 ‘남영나이론’으로 사명을 바꿨습니다. 


‘비비안’이라는 상표를 사용하기 시작한 건 1974년인데, 헐리우드 명작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여주인공 ‘스칼렛 오하라’를 연기한 배우, 비비안 리의 이름을 땄다고 해요.

『Gone with the wind(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2022년 표지 (Pan Books (UK))


1976년 상장한 후에는 프랑스 명품 브랜드인 ‘디올’과 상표 사용·기술협력 계약을 맺었습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주택건설업에 진출하거나, 해외에 공장을 세울 만큼 잘나갔지만 2010년대 들어 내의 시장이 침체되며 사정이 어려워졌어요. 


내의가 단순히 속옷에 머물지 않고, 스타일의 일부가 되거나 기능이 강조되는 과정에서 트렌드를 잘 따라잡지 못했다고 평가되죠. 해외 SPA 브랜드에 밀렸다는 분석도 있어요. 결국 2019년, 쌍방울그룹에 인수됐습니다.


레드오션에서도 혁신은 태어난다:

고탄력 스타킹과 애슬레저 시장


지금까지 이야기한 나일론 스타킹은, 우리가 알고 있는 지금의 스타킹과는 조금 달라요. 지금 우리가 아는 스타킹은 모두 ‘고탄력 스타킹’입니다. 남영비비안이 1979년 개발해, 1980년대에 상품을 내놓았어요. 사실 ‘고탄력(스타킹)’은 마케팅 문구이자 스타킹의 한 종류였는데 지금은 마치 일반명사처럼 쓰이고 있어요. ‘대일밴드’나 ‘스카치테이프’와 비슷한 경우죠. 


일반 나일론 스타킹은 실크 스타킹이나 니트 스타킹 등에 비하면 탄력이 뛰어났지만, 한번 늘어나면 형태가 다시 돌아오지 않았어요. 하지만 남영비비안이 이탈리아에서 ‘카바링사’라는 비싼 수입실을 수입해 개발한 ‘고탄력 스타킹’은 신축성과 복원력이 뛰어났습니다. 시장에 막 내놓았을 때는 2.5배 비싼 가격에 잘 팔리지 않았지만, 뛰어난 마케팅과 기술 국산화를 통해 5년 만에 판매량이 10배나 늘어났어요.


시간이 흘러 지금은 고탄력 스타킹을 혁신상품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2020년대 들어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애슬레저 시장 탄생에 기여한 공이 크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에슬레저는 운동을 뜻하는 애슬레틱(athletic)과 여가를 의미하는 레저(leisure)를 합성한 단어로, 스포츠 의류를 뜻해요. 익숙한 브랜드로는 룰루레몬, 뮬라웨어, 젝시믹스, 안다르 등이 있어요.


애슬레저 시장은 2025년까지 우리나라 돈으로 644조 원 규모에 달할 것으로 전망해요. 국내 애슬레저 시장을 이끄는 스포츠의류는 레깅스입니다. 우리나라 레깅스 시장 규모는 2022년 9천억 원을 넘어섰고, 지금은 1조 원을 돌파했을 것이라고 해요.


바로 이 레깅스를 만드는 기술과 고탄력 스타킹을 만드는 기술이 겹치는 점이 있어요. 레깅스를 포함한 스포츠웨어 전문 브랜드의 등장은 ‘스타킹이 발전해 온 역사’라는 기반이 있어 가능했죠. 레드오션에서 태어난 혁신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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