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제보다 잘나가는 ‘무궁화 스타킹’
스타킹은 처음에 서양에서 입던 바지 종류, ‘hose’의 일부였어요. 그런데 이 hose는 지금 우리가 흔히 입는 바지와 달리, 양쪽 다리가 분리돼 있어서 끈이나 단추로 고정해야 했어요.
그러다가 15~16세기 즈음 hose의 다리 부분을 별도로 ‘스타킹’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독자적인 의류가 됐다고 해요. 바지 겸 속옷으로서 스타킹의 치명적으로 불편한 점이 하나 있다면, 바로 흘러내린다는 거였죠.
옛날 사람: 신고 있으면 발목에 주름져요. 두꺼워서 더워요. 무릎 부분이 튀어나와요. 너무 흘러내려서 벨트와 멜빵이 필요해요.
듀퐁(회사): 얇고, 질기고, 탄력적인 화학섬유라는 것을 개발한다!
1930년대, 미국의 듀퐁사가 나일론을 개발합니다. ‘거미줄보다 가늘고 강철보다 강하다’라는 광고 카피는 석유에서 뽑아낸 화학섬유 나일론을 정말로 잘 설명했어요.
당시 나일론 스타킹 가격은 한 켤레에 1.15달러에서 1.35달러 사이로, 그때까지 스타킹 중 최고급이던 실크 스타킹보다 두 배 이상 비쌌어요. 그러나 내구성이나 착용감이 그보다 몇 배는 좋았기 때문에 비싼 가격에도 첫해 6천400만 켤레가 팔려나갔고, 듀퐁사는 돈방석에 앉았습니다.
불티나게 팔리던 나일론 스타킹 생산에 제동이 걸린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부터였어요. 나일론이 텐트, 모기장과 같은 군수용품 제작에 쓰이면서 스타킹 생산은 잠시 멈췄습니다.
보통 어떤 제품의 공급이 뚝 끊기면 소비자들은 그사이 어떻게든 대체재를 찾아내고, 제아무리 인기 있었던 상품이라도 시장점유율을 빼앗기기 마련이에요. 하지만 나일론 스타킹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1945년에 전쟁이 끝나자마자 다들 나일론 스타킹을 사러 오픈런을 뛰었죠. 🏃
그로부터 13년 후, 1958년 어느날, 우리나라에서도 나일론 스타킹이 생산되기 시작합니다. 바로 ‘남영비비안’이라는 회사가 기술 제휴를 통해 만들기 시작한 ‘무궁화 스타킹’이에요. 미국에서 생산되던 것과 마찬가지로 다리 뒤에 세로로 까만 봉제선이 있는 타입이었는데, 4년 후인 1962년에는 무봉제 스타킹도 생산하기 시작합니다.
1976년에 상장한 스타킹회사
놀라운 건, 우리나라에서 나일론 스타킹을 생산하기 시작한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 이미 우리나라 스타킹의 퀄리티가 외제보다 좋았다는 거예요. 1962년 기사를 보면 당시 우리나라 소비자들이 국산 스타킹을 외제보다 선호한다고 기록하고 있어요. 올이 덜 나가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만든 스타킹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우리나라가 어려울 때 경제에 힘이 된 수출 효자 품목이었습니다.
이 스토리의 주인공, ‘남영비비안’은 1957년에 설립, 1976년에 상장한 회사입니다. 보따리 무역상이던 남상수 남영산업 사장이 1957년 서울 명동에 ‘남영염직’을 세우며 시작됐어요. 1961년에는 영등포로 이사해 팬티스타킹을 만들기 시작했고, 1964년에는 ‘남영나이론’으로 사명을 바꿨습니다.
‘비비안’이라는 상표를 사용하기 시작한 건 1974년인데, 헐리우드 명작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여주인공 ‘스칼렛 오하라’를 연기한 배우, 비비안 리의 이름을 땄다고 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