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대리
‘국책’이라는 말이 앞에 붙으면 왠지 근엄하고 진중한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사람이 떠오른다기보다는 거대하고 묵직한 존재, 말 그대로 ‘보이지 않는 손’ 같은 느낌이에요.
어피티도 그 이상의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하던 어느 날, 국책은행인 산업은행 직원과 통화할 일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 또래의 목소리? 말투도… MZ?
산업은행 직원: 국책은행도 사람 사는 곳인 걸요… 저에겐 일요일 밤마다 출근하기 싫어서 잠 못 들게 만드는 직장이고요… (아련)
국책은행도 평범한 2030이 일하는 금융권 직장이었습니다. 새삼스레 이 사실을 깨닫고 나니 갑자기 궁금해지더라고요. ‘국책은행은 시중은행과 뭔가 다른 점이 있을까?’, ‘굳이 왜 국책은행이 존재하는 걸까?’ 하면서 말이죠.
어피티의 질문에 산업은행 이대리(30대, MZ) 님이 국책은행의 종류와 국책은행이 하는 일에 대해 설명해 주기로 하셨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곳은 ‘시중은행’
이대리: ‘은행’ 하면 어디가 먼저 떠오르시나요?
어피티: 김연아가 광고했던 KB국민은행, 아이유가 광고했던 우리은행, 뉴진스가 광고했던 신한은행?
어피티가 언급한 은행은 모두 시중은행입니다. 개인고객 비중이 높고,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어요.
시중은행은 다른 여러 기업과 마찬가지로 ‘이익’을 목적으로 합니다. 삼성전자가 스마트폰을 판매해 이익을 내는 게 목적인 것처럼 시중은행에서는 예적금 상품, 대출상품 등을 잘 만들고 팔아서 이익을 내는 것이 중요한 목표예요.
이 과정에서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흘러갈 수 있게끔 만드는 게 금융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죠.
정부가 지분을 소유한 국책은행
하지만 모든 걸 시장에 맡기면, 이 역할을 수행하기 어려울 때가 있어요. 리스크를 예측하기 어려운 신생 분야이거나,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사업에는 시중은행도 망설일 수밖에 없죠.
그래서 정부가 지분을 소유한 은행인 ‘국책은행’이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국책은행으로는 한국산업은행, 한국수출입은행, IBK중소기업은행이 있어요.
국책은행도 시중은행과 마찬가지로 수익 창출을 목표로 하지만 그게 첫 번째는 아니에요. 그렇다면, 국책은행들은 어떤 목표를 위해 일을 하는 걸까요?
국책은행에는 수익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산업은행은 이름에 ‘산업’이 들어가는 만큼, 산업 발전을 지원하고 개발하는 것이 제1의 목표입니다. 설립 목적은 한국산업은행법 제1조에 담겨 있을 정도로 중요해요.
“제1조(목적) 이 법은 산업의 개발ㆍ육성, 사회기반시설의 확충, 지역개발, 금융시장 안정 및 그 밖에 지속 가능한 성장 촉진 등에 필요한 자금을 공급ㆍ관리하는 한국산업은행을 설립하여 금융산업 및 국민경제의 건전한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산업은행은 1954년에 세워졌어요. 우리나라가 6.25 전쟁으로 황폐해져, 제대로 된 인프라는 물론, 산업도 존재하지 않던 때였어요.
경제 개발을 목적으로, 정부가 100% 지분을 보유한 순수 정부 은행인 산업은행이 만들어졌습니다. 산업은행에서는 정부의 신용을 바탕으로 경제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끌어와, 돈이 필요한 곳에 지원하거나 빌려줬어요.
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은?
산업은행 다음으로 세워진 국책은행은 중소기업은행입니다. 1961년에 세워진 중소기업은행은 이름 그대로 중소기업 지원을 목적으로 설립됐어요. 중소기업은행법에서도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 비중이 70%가 넘어야 한다’고 정해두고 있습니다.
마지막 세워진 은행은 수출입은행입니다. 1976년 설립된 수출입은행은 수출, 수입, 해외투자 등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해 주고 있습니다. 또 해외 자원 개발 등 대외 경제 협력에 필요한 금융도 담당해요.
국책은행에서는 어떤 일을 할까?
국책은행 세 곳 모두 개인고객보다는 기업고객의 비중이 높습니다. 기업을 운영하는 사장님, 재무 부서에서 근무하는 직원에게는 익숙할 거예요.
세 국책은행은 우리나라 기업의 ‘우산’이라고 불리기도 해요. 비가 올 때 쓰는 우산처럼, 경제가 어려워졌을 때, 국책은행의 지원으로 수많은 기업들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이 세 곳은 어떤 일을 하는 걸까요? 대표적인 담당 업무에 대해 사례를 통해 설명해 볼게요.
🏦 Case1. 기업은행
김기은 씨는 직원 다섯 명을 둔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어요. 앞으로 직원을 두 명 더 채용해 회사 규모를 키우려 합니다. 약 5천만 원 정도의 자금이 있으면 충분히 규모를 키우고, 잘 갚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때, 김기은 씨가 방문하면 딱 좋은 국책은행은 기업은행이에요. 기업은행에는 신용보증기금과, 기술보증기금 등의 협약을 통한 다양한 금융상품이 마련돼 있거든요. 소상공인분들과 중소기업에서 도움을 받기 좋습니다.
🏦 Case2. 산업은행
1999년과 2000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박산은 씨는 ‘현대전자’를 다니고 있었는데, 외환위기와 LG반도체 인수합병을 거치면서 수많은 빚을 떠안게 되었습니다. 산업은행은 한국에서 반도체 산업이 갖는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회사가 망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습니다.
당시 산업은행은 만기가 도래하는 회사채를 인수했고, 돈을 빌릴 수 있는 한도도 보장해 주면서 회사가 다시 살아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산업 전체를 내다보고 투자할 의무가 있는 은행이기 때문이에요.
박산은 씨의 회사는 결국 2003년 반도체 호황을 맞아 흑자로 전환할 수 있었어요. 현재 박산은 씨의 회사는 한국을 대표하는 반도체 기업, SK하이닉스가 되었습니다.
🏦 Case3. 수출입은행
신재생에너지 회사에 다니는 이수은 씨는 영국 해상풍력 발전 시장에 진출하려고 합니다. 해외 시장 진출을 위해선 여러모로 돈이 많이 들 텐데요, 이수은 씨는 수출입은행으로부터 450억 원을 대출받아 영국 진출을 성공적으로 시작했고, 신사업은 회사의 새로운 성장 축이 되었습니다.
세금으로 운영되는 걸까?
어피티: 국책은행이라고 하면 ‘공공’의 성격이 강하니까, ‘세금으로 운영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대리: 반대로 배당을 통해 정부의 세수 부담을 줄여주는 역할을 담당해요. 국책은행의 최대 주주는 정부니까, 수익을 내면 배당을 주는 거죠.
2019년부터 2023년까지 세 국책은행의 정부 배당금은 총 4조 2,521억 원이었습니다. 5년간 4조 원이 넘는 배당이 이루어졌어요.
2023년은 세수도 모자라는 등 정부 사정이 어려운 편이에요. 정부에 배당 수익을 주는 다른 공공기관도 경영 상황이 좋지 않아 정부 배당 수입이 지난해의 절반으로 떨어졌습니다. 적자를 낸 한국전력이나 가스공사는 배당금 0원을 기록하기도 했어요.
그래도 국책은행은 정부에게 줄 배당금이 있는 편이에요. 39개 정부 출자기관 중 올해 배당금은 기업은행이 4,555억 원으로 1위, 산업은행이 1,647억 원으로 3위, 수출입은행이 932억 원으로 4위를 차지했어요. 정부의 든든한 ‘사이드잡’이랄까요.
다음 시간에는 ‘정책금융’을 알아보아요!
‘똑같은 은행 같은데 왜 특별한 이름이 붙어있지?’ 하며 궁금했던 국책은행들, <국책은행에 사람 있어요> 첫 화를 통해 차근차근 알아볼 수 있었어요.
다음 화에는 각 국책은행들이 존재하는 배경인 ‘정책금융’에 대해서 알아볼 거예요. 뉴스에 항상 등장하지만, 그간 정확하게 알아볼 기회가 많지 않았던 개념이에요. 그럼 2화에서 다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