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이 뭐길래! 음모를 꾸미는 털털한 사람들 🥦



📌 코너 소개: ‘쓸모를 찾아서’는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감정과 마음, 에너지를 온전히 나 자신을 위해 쓰는 방법을 함께 찾아가는 마음 사용 설명서예요.


약 10년 전, 이제 막 한국에 브라질리언 왁싱이 상륙했을 무렵의 일이었어요. 친구 무리에서 트렌드에 가장 민감했던 여자친구가 선두주자로 왁싱을 받고 와서는 너무 편하고 좋다며 친구들에게 열심히 전파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그 친구가 불쾌한 경험을 했다며 미간을 찌푸렸죠. 아침 일찍 목욕탕에서 옷을 벗고 욕탕에 들어가려는데, 맞은편의 어르신들이 민망할 정도로 자신의 몸을 빤히 쳐다봤다는 거예요.


그때만 해도 그럴 법했어요. 당시 공중화장실 벽면에는 ‘무모증, 고민이신가요?’라는 광고 스티커가 자주 보였으니까요. 음모가 적어서 고민인 사람들을 도와주겠다는 내용이었죠.

giphy

시간이 흘러 이제는 브라질리언 왁싱이 꽤 익숙해진 것 같아요. 주변에 한두 명씩은 경험해 보고는 훨씬 산뜻하고 위생적이라며 꾸준히 받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에디터의 경험은 조금 달랐어요. 에디터도 직접 왁싱을 받아본 적이 있는데 위생적이라는 느낌은 별로 없었고, 오히려 소변이 갈 길을 잃어 화장실 변기에 앉을 때마다 신경 써야 할 게 늘어나 귀찮았죠. 게다가 전문 샵에서 받으면 회당 5~7만 원이나 들어, 비용도 만만치 않더라고요.


그런데 또 어느 날엔가, 모두가 속눈썹 연장에 푹 빠졌어요. 눈썹 한 올 한 올에 인조모를 덧대어 더 길고 풍성하게 만드는 거죠. 또 머리카락을 빨리 자라게 하는 패스트 샴푸와 비오틴 영양제가 유행이더니, 이제는 여름 전에 미리 레이저 제모를 받아야 한다며 뷰티 클리닉에서 만세 자세로 겨드랑이에 레이저를 쏘아대는 게 아니겠어요?


참 요상한 일이었어요. 옷 아래 감춰져 있는 겨드랑이, 음모 등은 뜯어내지 못해서 안달이더니 눈에 잘 띄는 목 위로 난 머리털, 눈썹털, 속눈썹은 더 풍성하고 길게 자라기를 바라니까요. 이 모순된 털 사랑,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요?


이번 ‘쓸모를 찾아서’에서는 우리의 털에 대해, 그리고 털의 쓸모(毛)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해요.

겨드랑이털 제모는
면도기 회사 질레트의 발명품? 🪒

제모의 역사는 사실 아주 오래되었어요. 고대 이집트에서는 제모가 신성함과 연관되어 있었답니다. 신들의 몸에는 털이 없다고 믿었고, 제사 의식의 일부로 털을 제거하기도 했어요.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는 제모가 고귀함의 상징이었어요. 넓은 이마를 만들기 위해 앞머리를 뽑았고, 심지어 ‘모나리자’처럼 눈썹과 속눈썹까지 제거하기도 했답니다. 왕족과 귀족들은 매끈한 몸을 유지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 머리카락을 제거하고 가발을 쓰기도 했죠.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제모가 계급의 상징이었어요. 이렇듯 역사 속에서 제모는 신성함, 고귀함, 계급, 순수함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어요.

Razor Archive , Farmer’s Wife , Vox , Bustle


오늘날과 같은 ‘미용 목적’ 제모의 대중화는 1915년 질레트가 여성용 면도기를 출시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죠. 당시 패션 잡지 하퍼스 바자는 겨드랑이 털 제거를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광고하며, 여성을 겨냥한 제모 문화를 확산시켰어요. 1920년대에 이후, 더 짧아진 의상과 비키니 수영복이 유행하면서, 노출된 피부를 깔끔하게 보이기 위해 겨드랑이뿐 아니라 다리와 비키니 라인까지 제모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었죠.


하지만 제모의 확산은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여성성을 한정하는 사회적 압박으로 작용했어요.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나일론 부족으로 스타킹을 대체하려고 다리를 면도하는 여성들이 늘었고,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면도기 광고가 ‘털 없는 몸이 남성에게 더 매력적이다’는 메시지를 강요했죠. 이처럼 1990년대와 2000년대에는 광고에서 제모가 여성의 수치심, 성적 매력 등을 강조하며, 여성들이 전신을 제모해야 한다는 인식이 커져갔어요. 이렇게 제모는 미용의 한 부분을 넘어 여성의 몸을 규정짓는 기준이 되어버렸고, 이는 여전히 우리의 일상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죠.

Harper’s BAZAAR


하지만 최근에는 이러한 관습에 저항하며 ‘겨드랑이 털 안 밀기 운동’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사실 ‘운동’이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단순해요. 그저 털을 자연스럽게 자라게 두는 것뿐인데도, 많은 사람들에게 큰 논란이 되고 있거든요.


최근 배우 에마 코린이 하퍼스 바자 표지에서 겨드랑이 털을 드러내자, SNS 반응이 뜨거웠던 것도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예요. 실제로 한 남성 비평가는 ‘이건 위생 관리의 문제’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반대로, 겨드랑이 털을 드러낸 코린의 모습을 옹호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어요. ‘남자들은 겨드랑이에 털이 많은데 굳이 여성들에게 위생을 이유로 털을 면도하라고 말하는 건 정말 아이러니하다’며 이중잣대를 꼬집었죠. 


재미있는 점은, 에마 코린이 겨드랑이 털을 드러낸 표지가 실린 잡지가 바로 하퍼스 바자라는 사실이에요. 100여 년 전, 겨드랑이 털을 제거해야 한다는 여성용 제모 광고를 처음으로 게재했던 곳에서 오늘날, 겨드랑이 털을 자연스럽게 드러낸 표지가 다시 실린 건 시대가 얼마나 변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겨드랑이 털을 밀지 않는 것은 그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일 뿐인데도, 여전히 일부 사람들은 이를 미적 기준이나 위생의 문제로 연결짓고 있다는 것도 눈여겨 볼 만해요.

🍑 복숭아 같은 내 얼굴, 털 많기도 하지요 🍑


그런데 최근에는 다소 당황스러운 게 인기를 얻고 있더라고요. 바로 솜털 밀기 유행이에요. 틱톡에서는 얼굴에 솜털을 제거할 수 있도록 식별해주는 ‘솜털 면도 스프레이’ 뷰티 팁 영상이 큰 화제를 모으고 있어요. 유명 틱톡커 레이첼 매디슨 칼라일의 영상은 조회 수가 무려 2천 만 회에 달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어요. 이 영상에서는 하얀색 가루 제형의 스프레이를 얼굴에 뿌려요. 그러면 솜털에 스프레이가 묻어서 얼굴 전체의 털이 한눈에 보이게 되죠. 그다음에 면도칼로 그 털을 밀어내는 거예요. 영상 속 여성은 면도 후에 피부가 매끄러워졌다며 반들반들한 피부를 자랑해요.

출처:@rachelmadisoncarlisle 


문제는 솜털을 밀어내는 게 미용적인 이유만으로 옳은 선택인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얼굴 솜털은 피부를 보호하는 기능을 하고 있잖아요. 이 상황을 풍자한 @casstherockwillson의 영상 속 스크립트를 함께 볼까요?


  • A: 우리는 어린 여자아이들에게 새로운 ‘문제’를 던져줘야 해. 그래야 신상품을 팔 수 있어.

(짧고 굵은 다리, 지나치게 뾰족한 팔꿈치 따위가 후보로 거론된 뒤) 

  • B: Peach fuzz는 어때? 얼굴에 복숭아처럼 난 솜털 말이야! 얼굴에 난 모든 털 중에서 눈썹이나 속눈썹 빼고는 다 밀어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거야.
  • A: 그거 좋다. 다 밀어버리게 만들자. 그런데 다들 제모용 레이저 정도는 갖고 있을 것 같은데 뭘 만들어서 팔아야 하지?
  • B: 걔네들의 얼굴에 있는 ‘솜털 문제점’을 더 강조해서 보여줄 요상한 스프레이를 안겨주는 건 어때?
  • A: 그거 좋다! 우리가 방금 발명해 낸 그 ‘문제점’을 더 도드라지게 보여주는 거야.
  • B: 그나저나 이게 말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우리는 솜털이 나도록 자연스럽게 진화되어 왔잖아.
  • A: 아마추어도 아니고, 우리는 항상 써야 할 이유를 만들어주잖아. 생각해봐.
  • B: 좋아, 솜털을 제거하면 메이크업이 더 잘 먹게 도와주고 스킨케어에도 도움을 주고 안티에이징에도 좋다고 말하는 거야!


@rachelmadisoncarlisle의 솜털 제거 영상에 반박하는 @casstherockwillson의 해당 영상을 본 한 여성의 반응이 눈에 띄더라고요. 이 여성은 이렇게 댓글을 남겼어요.


“당신의 영상 덕분에 제 솜털에 대해 스스로 의식하던 것이 줄어들었어요. ‘우리가 방금 만들어 낸 솜털 문제점’ vs ‘우리는 솜털을 가지도록 자연스럽게 진화했다’는 의견이 서로 충돌하는 게 강렬하게 다가와서 현실로 돌아왔어요. 고맙습니다.”


 만약 이 여성이 casstherockwillson의 영상을 보지 않았다면, 아마도 솜털 식별 스프레이를 샀을지도 모르겠네요. 솜털 하나하나까지도 관리해야 하는 이 세상 속에서 과연 우리는 얼마나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걸까요?


이 영상이 재미있는 이유는 미용 산업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필요’를 만들어내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점이에요. 솜털 자체는 자연스럽고 본래 존재해야 하는 건데, 어느 순간 그것을 ‘문제’로 인식하게 만들고, 그것을 해결하는 제품을 소비하게 하는 구조가 너무나 명확하죠. 이렇게 자극적인 마케팅 속에서 우리가 진짜로 건강한 선택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단순히 유행을 쫓고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시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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