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인
🎬 Scene #1.
돈 주고 물을 사 먹는
시대가 온다더니
옛날 사람: 아니, 물을 돈 주고 사 먹는다고?
요즘 사람: 그럼 물을 공짜로 먹어요? 물을 어디서 구해서 공짜로 먹어요?
옛날 사람: 우물물? 수돗물? 어쨌든 물은 사 먹는 게 아냐! 라떼는 말이야. 물을 돈 받고 파는 게 불법이었다고!
요즘 사람: 네에에에에에?!
물을 돈 받고 파는 게 불법이었던 건 조선 시대나 1950~1960년대 이야기가 아니랍니다. 생수 사업은 1995년에야 비로소 완전 합법이 되었거든요. 예전 어른들은 실제로 ‘이러다가 물도 돈 주고 사 먹겠다’라는 말을 농담처럼 하곤 했어요. 당시에는 이런 얘기들이 말 그대로 ‘농담’이었죠.
그렇다면 생수 사업이 합법이 되기 전까지 시장에서는 왜 물을 팔지 않았을까요? 그 배경을 간략하게 정리해보자면 이렇습니다. (당시 정부가 생수 사업을 금지했던 이유는 라떼극장 맨 마지막에 알려드릴게요!)
- 대다수 사람들이 물을 ‘상품’으로 인식하지 않았고,
- 그러한 대중적 인식을 고려했을 때 물을 판매할 경우 부작용이 우려되었으므로
- 이것이 법에 영향을 미쳐, 팔면 안 된다는 규정이 있었던 거죠.
그러다 이 모든 암묵적, 명시적 합의가 동시에 깨지고, 법이 바뀌고, 새로운 시장이 생겨난 한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낙동강 페놀 오염 사건입니다.
꽤 괜찮은 수돗물을
잘 마시지 않는 이유
사실 우리나라의 수돗물 품질은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이랍니다. WHO의 166개 기준을 모두 통과할 뿐 아니라 국내 기준은 300개로 세계 기준보다 훨씬 꼼꼼하기도 합니다. 집집마다 수돗물 수질검사를 무료로 해주기도 하죠.
우리나라는 1960년대까지 한강물을 거르지 않고 식수로 마시기도 했고, 1970년대까지도 서울에서 우물물을 길어 마시는 동네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죠?
2023년 기준 서울의 수돗물 직접 음용률은 36.5%입니다. 우리나라보다 비교적 낮은 수질을 제공하는 프랑스나 미국, 일본 등이 50~70%의 직접 음용률을 자랑하는데 말이죠.
우리나라 정수기 시장은 이미 2008년에 세계 4위 규모의 시장이 됐고 현재는 3조 원대까지 성장했습니다. 이렇게 요즘 사람들이 대부분 정수기를 사용하는 뭘까요? 이 품질 좋은 수돗물을 ‘끓이거나 정수하지 않으면 그대로는 못 마신다’라고 생각의 근거는 어디서 오는 걸까요? 수돗물을 그대로 마신다면 정수기 렌탈 비용도 안 내도 되고, 편의점에서 생수 사 먹을 일도 줄어들 텐데 말이에요.
수돗물에 대한 우려가 커진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이에요. 낙동강은 경상남·북도 인구 천만 명의 식수원입니다. 1990~1991년 사이 두산전자에서 낙동강 상류에 페놀 325t을 불법으로 방류하는 바람에 큰 문제가 되었죠.
🎬 Scene #2.
1991~1994년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
어피티: 피해 규모는 얼마나 됐나요?
피해 주민: 그걸 잘 몰라요. 사망자가 나오거나 하는 인명피해는 없었습니다.
어피티: 일단 인명피해가 없는 건 다행이긴 한데…
피해 주민: 직접적인 피해자가 없었던 건요, 페놀 탄 수돗물이 충분히 위험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대놓고 악취가 나니까 다행히 아무도 안 마셔서 그런 거예요.
페놀은 나일론, 제초제, 세제 등의 원료가 되는 화학물질입니다. 소량이라도 피부 접촉이나 흡입, 음용 등으로 인체에 흡수될 경우 사망에 이를 수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 나치독일이 사용한 독가스의 원료이기도 해요. 이런 화학물질이 사람들이 마시는 수돗물에 들어갔다고 생각하니, 정말 아찔하죠.
🎬 Scene #3.
사건의 수습과
그 결과
어피티: 그럼 어떻게 수습됐나요?
피해 주민: 처음엔 공무원 7명이랑 두산전자 직원 6명 구속하고, 나머지 관계자들은 징계받았어요.
어피티: 네? ‘처음’에요?
피해 주민: 환경부(당시 환경처)에서 두산전자 얼른 수출해야 한다고 바로 조업을 재개시켜줘서 보름 만에 또 페놀이 낙동강에 흘러들어갔거든요.
어피티: 수출이 중요한 게 아닌데… 그래서요?
피해 주민: 난리가 났죠. 당시 두산그룹 회장은 경영권 포기하고, 환경부장관은 경질됐어요.
어피티: 그랬군요.
피해 주민: 수돗물 못 믿는 건 물론이고, 맥주도 믿을 수가 없었죠.
이때까지 두산그룹은 사실 맥주나 김치, 햄버거를 주요 상품으로 하는 소비재 기업이었습니다. 하지만 페놀유출사건이 터지고 나서는 아무도 두산그룹이 파는 맥주를 안 마시기 시작했죠. 그 맥주가 바로 지금은 외국계 기업에 인수된 OB맥주입니다. 부동의 1위였던 OB맥주가 크라운맥주에 밀려나는 순간이었어요.
그렇게 두산그룹은 소비재 기업에서 중공업과 건설로 방향을 틀어버리고, 사람들은 웬만하면 수돗물을 안 마시게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분위기가 지속되자 정부도 그때까지는 불법으로 규제하던 생수 사업을 합법으로 만들어줄 수밖에 없었죠.
*다음 주 화요일(1/30) 머니레터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