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인
경쟁은 대체로 효율성을 높여요. 우리나라도 고도성장기에는 정부 중앙부처끼리 더 좋은 경제정책을 두고 치열한 주도권 경쟁을 벌였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어피티: 부처끼리 경쟁했다고요? 보통은 협업해야 잘 되는 거 아닌가요?
옛날 사람: 라떼는 말이야, 경제부처가 지금처럼 기획재정부 한 곳이 아니었어. 경제기획원, 재무부, 상공부가 서로 충돌하면서 경제정책을 만들었다고.
어피티: 팀플레이가 아니라 경쟁 체제였네요? 🤔
옛날 사람: 지금과는 또 다르게 큼직한 의사결정 거리가 많았거든. 수입 시장을 개방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정환율제가 낫냐, 변동환율제가 낫냐. 금융실명제를 실시하느냐, 마느냐, OECD에 가입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어피티: 듣고 보니 이해가 가네요. 경제구조와 시장질서의 틀 자체를 처음부터 짜야 하니 결정할 것이 정말 많았겠어요.
지금은 기획재정부가 우리나라 경제정책을 맡아 기획하고 실행하지만, 과거엔 ‘경제기획원’, ‘재무부’, ‘상공부’라는 세 거인이 서로 다른 경제 철학과 관점을 내세우며 경제 발전 성과를 겨루던 시절이 있었어요. 재무부는 나라 살림을 움켜쥐고 금융과 세제를 챙겼고, 경제기획원은 국가 경제 전체의 큰 그림을 그렸으며, 상공부는 강력한 정책집행력으로 기업을 이끌고 산업현장을 누볐죠. 셋 중에서도 경제기획원과 재무부 사이의 라이벌 구도는 유명했어요.
그런데 재무부와 경제기획원이 지금의 기획재정부로 통합된 지 약 20년, 다시 한번 경제부처의 권한 조정 이야기가 나오고 있어요. 올해 제21대 대선을 앞두고 예전처럼 기획과 예산 기능을 기재부에서 떼어내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했거든요. 물론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에요. 기획과 재정의 권한을 하나로 합칠 것인가, 분리할 것인가를 두고 오랜 시간 갈등과 실험이 반복되어 왔으니까요.
전통 있는 정통 경제부처 재무부 vs.
성장을 위한 슈퍼도전자 경제기획원
박정희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국가의 중심 과제로 내세웠어요. 박정희는 1961년 5월 군사정변을 일으켜 집권했고, 집권 초기에는 지금 이미지와 달리 정치적 기반이 상당히 취약했어요. 같은 해 8월에는 ‘민정 이양 로드맵’까지 발표하며 혼란스러운 정국이 안정되면 곧바로 물러날 것이라고 약속해야 했을 정도니까요. 이후로도 대학교수나 기자 등 지식인 계층은 틈만 나면 ‘민정 이양 토론회’ 같은 행사를 열어 주요 언론에서 보도되곤 했어요.
그래서 안정적인 집권을 위해서는 반드시 경제발전을 시켜야 했어요. 정부는 그간 나왔던 모든 경제발전정책을 모으고 솎아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구성했죠. 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신설된 부처가 바로 경제기획원이었어요. 당시 경제기획원(EPB)은 ‘계획국가의 두뇌’라 불릴 만큼 정부의 핵심 부처였어요. 예산, 정책, 통계, 외국자본 조달까지 모두 경제기획원 손에 있었거든요. 경제정책을 총괄할 뿐 아니라, 예산까지 직접 다루는 슈퍼부처였죠.
경제기획원은 설립 직후부터 ‘재무부’와 권한을 두고 충돌하기 시작했어요. 경제기획원이 ‘기획을 통한 계획(예산)’을 짜면, 재무부는 ‘실제 정부가 갖고 있는 돈’과 ‘통화정책’을 통해 견제했죠. 두 부처는 자주 각을 세웠어요.
경제기획원: 국가의 미래를 설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재무부: 우리 그만큼 돈 없습니다~ 🤗
경제기획원: 예산이 다 과학적으로 짜인 겁니다. 계획이라는 게 하나 삐끗하면 나머지도 다 효과를 못 봐요. 돈 줘요. 😑
재무부: 아니 지금 올해 버틸 돈도 간당간당하는데 무슨 10년 후 계획을 자꾸 들이밀어요?
이렇게 돈을 쓰는 부서(경제기획원)와 살림을 사는 부서(재무부)가 서로 팽팽하게 경쟁한 거죠.
재무부는 한국전쟁 직후부터 존재해온 가장 오래된 경제부처였어요. 원래는 조세행정을 다루는 조직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외환정책, 금융감독, 국채 발행까지 모두 재무부 소관이 되었어요. 재무부의 무기는 명확했어요. 바로 ‘현실성’이었죠. 경제기획원이 이상적인 계획을 들고나오면, 재무부는 “그거 못 해, 돈 없어”라고 말하는 역할을 도맡았어요. 그래서 두 부처가 한 회의에 들어가면 항상 긴장감이 맴돌았다고 해요.
초기에는 경제기획원의 힘이 어마어마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고도성장이 마무리되어 가던 1980년대에 들어서며 재무부의 권력도 많이 올라왔어요. 특히 ‘경제 민주화’와 ‘재정 개혁’이라는 시대적 과제가 본격화하면서 재무부는 점점 더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죠. 재무부는 은행 민영화, 금융실명제, 세제 개편 등을 통해 실물 경제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정책들을 주도했어요. 지금은 우리나라 경제부처가 ‘기획재정부’가 되어 있으니, 결국 끝까지 살아남은 조직은 정통의 재무부라고 볼 수 있겠어요.
경제기획원이
상공부와도 싸움박질한 사연
경제기획원이 거시경제의 설계자, 재무부가 재정·통화의 조절자였다면, 상공부는 산업의 실전 플레이어였어요. 상업, 무역, 공업, 광업, 전기, 연료, 수산, 특허 등 실물경제 전반을 포괄하는 부처로, 산업화 초기에는 국가 성장의 핵심 실행부처였어요. 자동차, 조선, 전자, 석유화학 등 한국의 대표 산업군은 대부분 상공부가 직접 챙긴 분야였죠.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 무역보험공사와 손을 맞잡고 ‘수출 진흥’과 ‘공장 짓기’를 총지휘했어요.
어피티: 이때 상공부는 공무원이라는 느낌보다는 좀 기업인 스타일인데요?
옛날 사람: 정확해. 상공부 공무원들은 수출계획서 들고 직접 해외를 뛰어다녔거든.
어피티: 대기업 종합상사의 상사맨들과 함께 말이죠?
옛날 사람: 꽤 친했지. 그래서 정경유착이나 부정부패 같은 부작용도 컸지만. 😏
1980년대 중반,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하고 중화학공업이 고도화에 성공하며 상공부의 위상은 정점을 찍어요. 반도체 산업 육성도, 자동차 산업 보호도 대부분 상공부 손에서 이루어졌거든요. 당시 상공부는 경제기획원·재무부와 함께 정책 조정에 들어가면 예산권이나 거시정책 조정력은 약했지만, 산업정책 실행력과 기업·현장에 대한 영향력은 막강했어요. 그러다 보니 산업을 지원하는 정책을 마련할 때는 경제기획원이나 재무부와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었죠.
상공부: 정부가 수출용 기계설비에 과감하게 투자해 주지 않으면 우리 기업이 정글 같은 글로벌 시장에서 어떻게 살아남느냐 이 말입니다! 😠
경제기획원: 그 참, 자꾸 대기업 회장들하고 어울려 다니다가 능구렁이 같은 장사꾼들한테 휘말린 모양인데, 지금 우리 경제는 과잉투자하고 인플레이션이 걱정이에요. 돈을 쓰려거든~ 거시적으로~ 🤨
재무부: 아이고 둘 다 안 들린다! 우리 돈 없다! 😤
철강이며 기계, 조선과 화학 등 중화학공업 집중 육성 정책을 추진하던 1970년대에 상공부는 산업 성장을 위한 대규모 투자를 강력하게 주장했어요. 산업과 비즈니스는 타이밍과 트렌드라며 많은 예산을 신속하게 집행해 제대로 된 효과를 봐야 한다는 기조를 유지했죠. 하지만 경제기획원은 ‘안 그래도 과성장으로 인플레이션이 심한데, 경제 안정을 위해서는 과잉 투자를 그만둬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재무부는 ‘그 돈은 다 어디서 나냐’며 회의적이었어요. 이때는 대통령이 상공부의 손을 들어주었답니다. 사실 이때는 대통령이 셋 중 어떤 부처 편에 서느냐에 따라 힘의 균형이 바뀌던 시절이었어요.
현재 상공부는 산업통상자원부(산자부)로 바뀌었는데요, 산자부는 산업, 에너지, 통상, 수출 등 실물경제 전반을 담당하는 주무부처예요. 조직상으로는 과거 상공부보다 더 많은 분야를 포괄하고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정책 기획·예산·조정 권한이 기재부에 집중되어 있고, 대통령실과 국무조정실의 컨트롤타워 역할이 강화되어 산업부의 독자적 정책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어요. 실물경제 실행·지원 중심의 실무부처로 성격이 바뀌었죠. 시대적으로 지금은 민간기업이 스스로의 힘으로 시장에서 살아남아야지, 정부가 하나하나 도와줘야 하는 상황이 아니기도 하고요.
경제부처 구조를 바꿔버린 김영삼과
금융실명제 전격 도입
경제부처를 이렇게 쪼개두었을 때의 장점이 상호 경쟁이 가져오는 건강한 효율성이라면, 단점은 의사결정이 한없이 늘어질 수 있다는 거예요. 독재정권이 있을 때는 이 단점이 그렇게 크지 않았어요. 최고 결정권자가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1987년 민주화 이후에는 경제기획원을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 돼요.
마침 중요한 결정을 사이에 둔 부서들 사이 의견 갈등도 절정에 이르렀어요. 경제기획원이 OECD 가입을 염두에 두고 시장개방 계획을 수립하고 있을 때, 재무부는 자본자유화와 외환시장 개방이 불러올 부작용을 우려하며 제동을 걸었어요. 또 ‘금융실명제’와 같은 개혁안도 경제기획원은 투명한 시장 조성이라는 명분 아래 추진하고 싶어 했지만, 재무부는 시기상조라며 강력히 반대했어요.
그러자 김영삼 대통령은 경제기획원도 재무부도 관여하지 못한, 철저히 정치적인 ‘깜짝 개혁’으로 금융실명제 도입을 해치워 버려요. 이 사건은 ‘경제 컨트롤타워를 하나로 묶자’는 주장에 불을 붙였어요.
금융실명제는 이전 정부들이 우리 금융시장의 발전을 위해 수십 년간 시도해 온 일이었어요. 하지만 익명으로 자산을 쌓아둔 고액 자산가들의 반발에 번번이 좌절됐죠. 경제기획원과 재무부의 일부 관료는 물론 상공부와 친밀한 기업인들은 뒤에 검은 재산을 쌓아두고 결사적으로 반대한 탓이었어요. 이제 김영삼 대통령 앞에서 경제부처들은 무엇을 주장하든 명분이 없었어요.
김영삼: 이제 우리 옛날처럼 계획경제 안 한다. 국가사회주의 말고 시장경제 할 거야.
경제기획원: 하지만 아직 완전히 자유로운 시장경쟁을 하기에는 너무 이른데요!
김영삼: 당신들한테 안 이른 게 도대체 뭐가 있어? 출근 시간? 식사 시간?
경제기획원: (보수적) (안정추구성향) 😒…
1994년, 김영삼 대통령은 경제기획원을 해체하고 재무부와 통합해 ‘재정경제원’을 만들어요. 명분은 ‘기획과 재정의 일원화’였지만, 실제로는 ‘계획경제는 구시대 유산이며, 선진국처럼 시장 메커니즘을 중심에 둬야 한다’는 정치적 메시지를 강조한 것이 컸죠.
옳은 말이었어요. 경제기획원은 군사개발독재의 상징 같은 존재였어요. 언젠가는 사라져야 했을 조직이었죠. 하지만 준비가 너무 부족했어요. 갑작스러운 조직 해체는 행정 효율을 오히려 떨어뜨렸어요. 예산과 정책 조정 기능이 약해지면서 각 부처가 알아서 잘하기는커녕 ‘재경원 일방통행’ 구조가 강화됐어요. 1997년 외환위기는 이러한 불균형 구조의 취약성을 고스란히 드러냈어요. 정책 조율 부재, 정보의 분절, 경제기획 기능의 상실이 우리 경제에 타격을 줬어요.
이후 재정경제원은 1999년 기획예산처와 재정경제부로 나뉘었어요. 견제 없이 재정경제원 한 곳만 있을 때 우리나라는 외환위기라는 너무 큰 부작용을 겪어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기획예산처와 재정경제부는 2008년 이명박 정부에서 다시 기획재정부로 통합되며 지금의 구조가 완성돼요. 현재 기획재정부는 어쩌면 경제기획원보다도 힘이 센, ‘기획+재정+경제+국제금융’을 한 손에 쥔 하이퍼 슈퍼 부처예요. |